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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가득한 내 삶

2014 독서왕 4. 유민진

  • 유민진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4.12.23 23:04
  • 수정 2015.12.1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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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무료해지던 어느 날,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기만 했던 책(「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저/이창석 역/산해)을 꺼내 읽게 되었다.

헬렌켈러의 삻은 그동안 텔레비전을 통해, 그리고 어린 시절 위인전기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녀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 그녀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의 수천 배에 달하는 노력을 하며 살아간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의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온 몸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보다 더 깊이 보고, 더 충만하게 느끼며 살았던 모습은 감동 그자체이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속을 오랫 동안 산책하고 돌아오는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중략)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속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라는 헬렌 켈러의 질문이 내 마음 속에 묵직하게 박혀왔다. 바쁘다는 핑계 아래 천혜의 아름다움 속에 살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모르고, 꽃이 피고 지는 것, 계절의 오고 감을 못 보고 사는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눈은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는 나는 장님이요, 귀머거리요, 벙어리이다.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아침에 눈을 떠서 창문으로 쏟아지는 신선한 아침햇살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일 년 중 가장 맑고 아름다운 겨울밤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언제나 내 마음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겸허한 감동에 젖게 하는 저녁노을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햇살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보석처럼 반짝이는 푸른 바다의 모습, 쏟아지는 별빛과 달빛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죽은 듯 메말라있던 나무에서 움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는 경이로운 모습, 바람결 따라 살랑살랑 춤을 추는 나뭇잎, 그 잎 사이로 소곤소곤 반짝이는 햇살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시멘트 블록 사이로 방긋 얼굴을 내밀고 샛노란 웃음을 짓는 민들레, 가을 들길에서 수수히 빛나는 구절초와 크스모스 같은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환하게 미소 짓는 이의 얼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 아이들의 천사 같은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부모님의 주름 진 얼굴,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사랑하는 내 아이가 하루하루 자라가는 모습, 울고, 웃고, 떼쓰는 모습, 먹고 자는 모습,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뛰어노는 모습을 볼 수 없다면 어떨까. 아이가 그린 그림, 만든 작품을 볼 수 없다면···.

아침을 깨우는 청아한 새의 지저귐, 지붕을 타닥타닥 때리며 내리는 정겨운 빗소리,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어떨까. 감미로운 음악소리,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 까르르 웃는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어떨까. 남편과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어떨까. 음정, 박자, 가사를 무시하며 빽빽 소리질러가며 노래하는 아들 녀석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어떨까. 사랑하는 이들에게 소리 내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면 어떨까.

단 사흘만 그렇게 못보고, 못듣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사흘을 보내게 된다면 아마도 보고, 듣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게 되겠지. 길가에 무심코 피어나는 꽃 한 송이도 경이롭게 여기게 되고, 내 아이의 웃음소리, 음악소리는 마치 천상의 소리와 같이 느껴질 것이다.

헬렌 켈러는 책 속에서 만약 당신이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하겠는지를 물어왔다. 만약 내가 사흘만 볼 수 있고 그 후로 다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암흑세계에 살게 된다면 그 사흘을 어떻게 보낼까. 무엇을 할까.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 없다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콱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저 지금 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사지육신 멀쩡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된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내가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녹녹치 않은 인생살이와 험악한 일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세상을 보노라면 차라리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게 낫다고 여길 때도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푸념의 소리일 뿐.

헬렌 켈러의 말대로 오늘 하루만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 단 하루만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내 모든 감각을 사용하며 살리라 다짐해 본다. 마치 오늘 하루가 내게 주어진 마지막 하루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게 되기를···.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으로 나에게 있는 것을 겸손히 나누며 살아야지.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혀, 혹은 번잡한 일상에 매여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갈 때면 내게 있는것에 대한 감사를 잃고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질 때면 그때마다 이 책을 들여다보리라.

보고, 듣고, 말 할 수 있음에도 하늘 한 번 쳐다 볼 여유도 없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멀리 있는 성공만을 보며 달려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들에게 단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무얼 하겠냐고 묻고 싶다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의 삶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감사를 심어 주었듯 앞으로도 분명히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