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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톺아보기)아픈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소서

박남수(편집국장)

  • 박남수 기자 wandopia@daum.net
  • 입력 2015.06.04 10:57
  • 수정 2015.11.0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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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소안도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한국전쟁 전후로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 250여 영령들을 위로하는 추모제다. 희생자 수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100여 명 유족들이 뜨거운 햇볕 아래 눈물을 삼키며 우리 역사와 국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둥근 모양의 위령탑 한 부분이 끊어진 듯 이어져 있다. 끊어진 과거와의 화해를 위한 염원이라고 했다. 그 위령탑 앞에 양쪽 모서리가 다듬어지지 않고 거친 검정 대리석 판 위에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이 아픈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소서.” 그 앞에 놓인 상에 허리가 굽은 팔순 노인이 준비한 제물을 힘겹게 올린다. 플라스틱 통 뚜껑을 열고 제기를 쓰지 않고 통째 올렸다. 이유를 물으니 수많은 영령들을 위한 배려라고 했다. 안타까웠다. 그릇 하나씩을 올리고 나서 노인은 허리를 펴 푸른 하늘을 우러렀다.

주로 추모사업회 회원들과 임원들이 참석했다. 손꼽을 만큼의 외부인사가 추모제 자리를 빛냈다. 완도군수는 군 행사관계로, 완도경찰서장은 일신상의 이유로 불참했다. 완도군의회 의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국회의원은 조전으로 참석을 대신했다. 준비했으나 미쳐 펴지 못하고 추모공원 한 켠에 높이 쌓여있는 의자들은 그들을 위한 자리였을 것이다. 거기엔 소안배달청년회 회원들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 아이들을 기대하는 이는 아예 없었다.

추모사업회 고진 고문이 읽은 추모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실렸다. “1949년 여름 이승만 정권은 소안도 청장년들을 법적 절차도 없이 사살, 수장하는 국가폭력의 만행을 저질렀다. 주민학살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중략) 편안한 섬 소안은 살육과 야만의 섬 킬링 필드가 되었다.” 250명 주민들을 죽인 킬러는 바로 국가였다.

2010년 국가기구인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국가가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책임 있는 사과를 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 없다. 그러면서 결론은 늘 한결 같다. 지난 과거의 슬픈 역사는 다 잊고 새롭게 출발하자고. 그날 추모제는 평화롭게 끝났다. “써놓고도 부칠 곳 없어 이 자리에서 읽는다”는 김중배 유족의 편지에 모두가 참았던 눈물을 쏟고 대성통곡했다.

1948년 4월 제주에서 일어난 4·3사건으로 15,000여 주민이 희생됐다. 일년 뒤 완도 전역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으로 2,000여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다. 소안도에서만 250명이다. 횡간도는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죽임의 이유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다. 이후에도 비극은 되풀이됐다. 1960년 4월에도, 1980년 5월에도. 지난해 4월 진도해상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건에서 국가의 폭력성을 찾는 이들도 많다.

완도경찰서장의 추도사를 대신 읽은 이종운 소안파출소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했다. 기자에게는 역사를 올바로 기억하는 민족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소안과 완도 전역에서 발생한 역사적 진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고 마련한 추모제에 우리 완도 미래의 주역인 학생과 청년들은 아쉽게도 부재했고 그들을 위한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래서 완도의 미래가 걱정된다. 

내년 5월 29일에도 소안면 희생자 추모제는 열린다. 언제쯤 이 아픈 영혼의 상처가 아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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