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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을 막아주고 풍어 비는 고금도 용초리 갯제

김하용(향토사연구가)

  • 김하용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5.11.05 09:14
  • 수정 2015.11.09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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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면 청용리는 현종 대(1672) 밀양 박 씨 박태석이 강진에서 살다가 고금도로 입주, 산세가 아름답고 지형이 따뜻하게 생긴 운동에 정착한 후 김해 김 씨, 경주 이 씨, 해주 오 씨 등이 차차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시에 조그마한 연못에서 용이 승천했다 하여 용지동(龍池洞)이라 불렸으나 건천리(乾川里)라고도 불렸다. 이는 개천은 있으나 물이 흐르지 않은 천이라 하여 이름했다. 한일합병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청용리라 개칭하여 현재까지 부른다.

청용리(靑龍里)는 용나무골 산등이 용의 등처럼 굽어 있고 현재 자연부락 청용리, 청학리, 용초리의 통합 명칭이며 1950년에 통합되었다가 청용, 청학만으로 분구되고 용초를 청용리 6반으로 두었다가 근래에 분구되었다.

용초리 마을 지형은 서부 해안 덕암산 너머에 위치한 마을로 용이 마을 앞의 웅덩이에서 승천했다 하여 용치, 또는 용초리라 부른다. 마을의 경지면적이 협소해 대부분이 어업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또한 마을에서 특용작물로 유자와 양다래를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용초리가 조상 대대로 마을 공동으로 모셔오고 있는 제의 명칭은 갯제 또는 해제 용신제라고 부르며 매년 정월 보름날 성대하게 모신다. 갯제의 제장은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이름이 유래된 용둠벙에서 지냈으나 그 이후부터는 바다를 주업으로 살기에 선창의 입구와 끝에서 지낸다. 제관은 마을의 임원들이 동회의에서 협의해 생기 복덕 하고 부정이 없는 참신한 사람을 선출한다. 제수는 마을 공동 비용으로 지출되며 돼지머리, 과일, 나물, 생선, 등을 구입하였는데 주로 강진의 마량장을 이용했다. 제수를 살 때에는 가장 우량상품으로 구입해야 하며 물건 값을 깎아서는 안 되며 상인이 요구하는 대로 값을 지불한다.

제일 보름 전부터 마을 모든 사람들이 모여 마을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모든 행동 가짐을 바르게 했으며 제장 주위에 금줄을 치고 배의 출입항을 금지시킨다. 제관 집에도 금줄을 치고 황토 흙을 깔았으며 동민들은 제주에게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이는 부정한 사람이나 잡인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기 위함이다. 제는 밤 8~9시 경에 선창 입구에서부터 끝 순으로 진행한다. 제물은 각각 따로 진설했데 입구에서 진설한 제물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음복을 하고 선창 끝에서 진설한 제물은 바다에 모두 헌식한다. 이는 바다에 사는 잡귀, 잡신 몫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제의 기원은 김과 미역의 풍작 그리고 풍어와 마을의 평안이다. 갯제는 부정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 함께 지냈는데 1시간여 소요되며 제가 모두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제굿을 치고 마을 곳곳을 돌며 지신밟기 등 한바탕 신나게 뒤풀이를 하면서 이웃 간에 더욱 깊은 정을 쌓았다. 예전에는 제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의 청년들이 김이나 미역이 잘 된 이웃 마을에 가서 갯벌을 훔쳐다가 우리 마을에 뿌리는 의식이 있었으나 요즘은 행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의 민족문화 유산들이 자꾸만 현대문명에 밀려나 사라져 가는 것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