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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방식은 변했어도 마을 인심은 그대로제”

우리마을 리포트: 완도읍 대구리

  • 김영란 기자 gjinews0526@hanmail.net
  • 입력 2015.12.30 11:38
  • 수정 2016.01.0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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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138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대구마을은 예전 ‘죽하리, 황금미라고도 했다. 1700년대에 ‘대구미(大口尾)’라고 불리웠으며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 '대구미(大口味)'라고 했다.

옛 화흥포 항구가 있는 마을로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 왕래 길에 들러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뱃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완도의 상황봉 남쪽으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내려오다 멈춘 끝자락이 큰 거북의 형상과 같다해 대구미(大龜尾)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는데, 글자가 까다로와 대구미(大口咪)와 대구미(大仇咪)로 고쳐 썼다고 전한다.

대구 마을 주민들은 마을 앞에 바다가 있어 농사도 지으면서 바다에서는 주로 낙지를 잡았고 김발과 석화양식장에서 소득을 올렸으나, 화흥포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없어지고 농지로 전환돼 지금은 농업이 주업이 됐다.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 선창은 돛단배(중선 배)도 자주 다니곤 했었다. 소안도나 신지 등지에서 멸치젓을 팔기위해 오면 대구미나 화흥리 주민들이 통이나 양동이를 이고지고 서로 먼저 사기위해 배까지(노두) 바닷길을 따라 줄지어 달려 가곤했었다고 전한다.

대구마을의 당제는 당초 부흥리와 같은 당신을 모시고 제를 지내오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부흥리와 분리돼 할미 당을 모시게 됐으며 현재는 이장이 정월 초하루에 간소하게 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의 공동우물도 당할머니 샘과 가운데 샘, 아랫 샘 등 3곳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쇄 됐다.

대구마을도 요즘 여느 농촌마을과 같이 아기 울음소리가 없어진지 오래다. 가구마다 부부 또는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아 빈집이 자주 생기지만 마을인심이 좋아 바로 입주자가 생긴다고 한다.

특히나 대구마을은 젊은 사람들이 새로 전입하는 경우가 많아, 마을 주민들은 마을 인심을 듣고 살고자 찾아와 주는 젊은이들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주민들은 “세월이 흐르고 우리네 삶의 방식이 달라지면서 가족 구성형태가 변했다. 자식들이 부모하고 살지 않으려하는 경우도 많고, 반대로 부모들이 자식들하고 살고 싶지 않다고도 한다. 세상이 달라도 많이도 달라졌다”며 하지만 마을인심 만큼은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드는 우리 대구마을은 미래가 있어 가슴 뿌듯하다. 사람사는 곳에 사람사는 맛이 나는 대구마을이 최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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