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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해조류의 역사는 완도수협의 역사

독자기고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10.21 11:54
  • 수정 2016.10.2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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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래 / (사)장보고연구회 이사장

 해조류와 완도수협은 하나로 발전하였다. 전국수협 중에 유일하게 완도수협은 해조류 수협이다. 역사는 거울이다. 그리고 미래의 지표이다. 따라서 해조류역사는 완도수협의 역사이며, 완도(금일,소안)수협에서 해조류 산업을 발전시켜 나가야할 의무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조류에 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춘궁기에 식량을 대신하는 경우를 빼고는 산모가 출산하였을 때 산후 조리용으로 식용했던 것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1896년 완도가 설립되고 1900년부터 외세의 개입으로 항구를 개방하고 문물을 교류하는 경제전면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완도해조류는 1905년부터 일본으로 수출하는 주요품목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해조류를 공업용으로 소비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2차대전에 실패하고 원폭의 피해로 무너진 건축물을 복구하기위해 건축업이 호황을 누릴 때이다. 일본건축은 호료원료(糊料原料)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호료원료인 우무가사리, 천초 등이 극히 부족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버려진 재료였다. 일본에서 해초는 금값이었다.

한일합방 전 당시 1905년경 우리나라에 세관도 없던 시절이다. 완도를 중심으로 상인들(보길 김상근, 고금 김상석)이 해조류를 일본으로 직접 수출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해초 한 배를 실고가면 돈을 한 배 싣고 왔다.”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고 한국해조류를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일본으로 팔려간 제품은 품질이 다양하고 질이 떨어진 것을 보안하기위해 1913년 5월14일 조선 총독부령 49호로 해조검사규칙을 정하여 수출입업무는 식산국에서 담당하고 검사소는 세관에 편입시켰다. 1914년 수산물 검사소를 만들고 한국에서 검사에 합격한 제품만 일본으로 가져갔다. 당시 목포해조조합의 통계에 의하면 전국 해조류 생산량의 65%가 완도산이었다. 총독부에서는 많은 생산자들을 직접 관리하기가 어려워 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완도에서 본격적으로 해태를 생산한 시기는 1912년경 일본인들이 완도에 들어와 해태양식시험장(현 농촌지도소)를 운영하면서 무료로 많은 어민들에게 양식기술을 보급하였다.

완도 해태조합은 1917년 11월 19일 총독부령 15호에 의거 일제수탈의 목적으로 조합을 설립하였던 것이 지금에 이른다. 협동조합의 초기단계인 것이다. 당시 조합 이사는 일본사람이었으며, 사무실과 창고는 구중학교 자리에 설립되었다. 당시 완도해태조합은 우리나라 경제단체로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완도군수협의 역사는 내년이 100년이다. 100년의 역사는 해조류 역사이다.
1917년 해태를 수출하기위해 만들어진 “완도해태조합”은 협동조합의 초기단계이다. 완도해태조합의 성공에 따라 농수협동조합이 각기 생기게 되었으며, 순수하게 해조류를 주 품목으로 하였던 협동조합은 완도수협이 유일하다.

(다음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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