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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피었다가 어느날 붉은 낙화, 생사 초월한 듯

[완도의 자생 식물] 5. 능소화

  • 신복남 기자 sbbn2000@hanmail.net
  • 입력 2017.07.07 19:57
  • 수정 2017.07.0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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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큰 나무 꼭대기에서 꽃이 피었다. 더 가까이 가 보니 능소화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 나무 위에서도 꽃이 되는구나.

우리의 삶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모든 꽃들이 그렇듯 빗속에 피는 꽃이 더 생동감이 있다. 기쁨의 눈물 속에서 웃는 얼굴은 어떤 꽃과 비교할 수 없다. 낯선 길을 가다가 비에 젖은 얼굴도 마찬가지다. 어느 곳에 있든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만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계속 진행될 것이다. 특히 물과의 만남은 삶의 속도를 낮추거나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 능소화 꽃잎과 빗방울이 만나면 그 순간만큼은 환희에 찬 눈물이다. 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하지만 꽃이 되기까지 그 나름대로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땐 에너지가 많이 소비한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산고를 겪듯이 꽃도 고통 속에서 핀다. 그렇다면 빗속에 핀 꽃잎이 얼마나 애잔한가. 장독대에서, 담벼락에서 갑자기 얼굴을 내민 능소화를 보면서 동백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화려하게 피어있다가 그대로 땅에 떨어진 동백꽃과 여름에 핀 능소화도 핀 채로 느닷없이 담벼락 아래에 있다. 능소화는 남부지방에서만 피었다. 지금은 기후변화로 서울에서도 볼 수 있다. 피부에 피멍이 들어 피가 돌지 않거나 자궁에 출혈이 있을 때 좋은 약재로 특히 부인병에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집안에 한두 그루씩 심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원에 관상용으로 심는다. 주홍빛 능소화는 남중국에서 귀화했다고 하고 능소화 꽃잎보다 좁고 긴 붉은 꽃은 미국에서 귀화한 미국 능소화가 있는데 이름은 정확하게 명명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속에서 꽃이 피는 줄도 모르고 질 때도 모른다. 설령 땅에 떨어져도 피어있는 채로 생에 대한 미련은 없다.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대로 그 순간만큼은 나를 나답게 한다. 낙화된 능소화는 나무 끝에서 피어있는 것과 다름없다. 며칠 피었다가 지는 게 꽃이라지만 능소화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듯하다. 길게 늘어선 골목길 위에서 수많은 만남을 기억하게 한 능소화. 그러나 지우라고 한다.

살면 살수록 단순해야 된다고. 한 가지로 수렴해야 된다고. 나도 모른 사이 사랑이 왔다가 그냥 훌쩍 떠났다. 오늘 능소화 꽃이 갑자기 다가왔다가 그 마음 오롯이 품고 미련 없이 땅 위에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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