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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다

[문학의 향기]교산과 매창의 사랑 2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7.11.18 13:25
  • 수정 2017.11.1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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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는 완전한 자유를 사랑한다. 혁명가에게 구세주나 신의 대리인, 그리고 메시아는 필요 없다.

그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움직이며 다른 사람을 추종하거나 모방하지 않는다. 그는 위험하고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 길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자유를 안겨준다. 그는 여러 번 실수하고 실패도 겪는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삶의 깊은 비밀을 배웠기 때문이다. 지혜를 얻으려면 실수를 겪어야 한다. 그 외에 다른 길이란 없다. 그래서 혁명가가 내딛는 발걸음이란 누구도 밟지 않는 세상의 첫 발인 것이고, 그 첫 발은 지금까지 가장 완전한 것이다.

1561년(명종 16년) 어느 가을날, 이무기가 교산 아래에 있던 큰 바윗돌을 깨뜨리고 사라졌는데, 이때 두 동강 난 바위에 문처럼 구멍이 뚫려서 교문암(蛟門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허균은 이무기가 바위를 두 동강 내고 사라진 지 8년 뒤인 1569년(선조 2년) 11월3일 세상에 나왔다.

어렸을 적 외가 집을 왕래할 때 허균은 분명 이 마을에서 회자되는 ‘이무기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들었다. 이때 허균은 아마도 자신이 이야기 속 이무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믿었고 그리해 자신의 호를 교산(蛟山)이라 이르렀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마치 양반이 되지 못한 서자 출신의 홍길동이 이데아인 율도국을 건설한다는 홍길동전과 딱 맞아 떨어진다.
시대의 이단아.

조선 중기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지배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산의 생활 방식은 가장 자유분방했다.

허균은 자신이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당대의 법과 도덕관념을 훤히 꿰고 있으면서도 보란 듯이 죄를 지은 확신범이었다.

그는 황해도 도사로 부임하면서 서울 기생을 데리고 갔고, 모친상을 치르는 와중에 기생과 잠자리를 가졌다. 다른 양반들은 그런 짓을 하더라도 눈치껏 몰래 하는데, 허균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문서로 기록까지 했다.

그 일들로 자신을 욕하고 벼슬을 빼앗는 조선사회에 대해, `성소부부고'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여봐라!"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남녀 유별의 윤리는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은 하늘보다 한 등급 아래이니, 난 성인을 따르느라 하늘을 어길 수는 없다.” 또한 그는 성리학만이 정통으로 용납되던 시기에 불교와 도교, 천주교까지 스스럼없이 섭렵하고 받아들인 이단아로 특히 사명당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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