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충무공 유적지, 한중 역사공조로 물 만났다

양국 정상 모두 한·중 우호협력 상징‘이순신-진린’언급...위상 정립과 국책사업 건의 필요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12.30 16:29
  • 수정 2017.12.30 18:34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왼쪽), 관우상(중앙), 명나라 수군 진린 도독(오른쪽). / 한겨레 자료


지난 15일 중국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베이징대 강연에서 완도군과 한·중 우호협력 상징으로 ‘이순신-진린’을 언급하면서 관왕묘 건립 등 완도군의 이순신 호국·관광벨트 구축사업이 세간의 주목받고 있다.

방중 당시 베이징대에서 문 대통령은 “한국의 완도군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지금 진린 장군의 후손들이 2천여명 살고 있기도 합니다.”라고 강연하면서 한·중의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6명의 인물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그중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으로 함께 일본에 맞서 싸운 ‘이순신-진린’은 2014년 방한 당시 서울대 강연에서 중국 시진핑 주석도 언급해 더욱 양국 협력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실제로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 진린 도독의 관계는 굉장히 돈독했다. 처음 이순신이 1598년 2월 고금도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기고, 7월 명의 광동 수군 5천명과 전함 수백척을 거느리고 진린이 도착해 조·명연합군 수군사령부가 설치됐을 때는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 조선은 명이라는 나라는 사대하는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초반에 이순신에게 백성을 괴롭히고, 전공을 탐하는 등 진린의 명 수군의 일탈행위는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순신도, 진린도 자기 나라에서 ‘명장’이라 불리는 장수들이었기에 사람을 알아봤다. 먼저 이순신이 왜의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와주고 진솔하게 진린을 대하자 진린은 이순신의 인품에 감복해 이순신을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는 경칭으로 부르고, 가마를 타고 어디를 갈 때에도 감히 앞서가지 아니했다는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이다. 심지어 이순신을 알아본 진린은 명 황제 신종에게 이순신을 명의 신하로 삼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노량해전이 끝나고 이순신의 죽음을 가장 애석해 한 것도 진린이었고, 이순신의 운구를 고금도로 다시 옮겨와 월송대에 가묘를 만든 것도, 지역 백성들에게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이순신의 제를 부탁한 것도 진린이었다. 최근엔 명 황제가 이순신에게 내려주었다는 팔사품도 진린이 이순신을 기억하는 상징으로 주고 간 것이라는 논문발표도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 기록에도 진린은 전쟁이 끝난 후 선조를 만났을 때 “이순신은 보천욕일의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라고 최대의 칭송을 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흐린 태양을 목욕시킨 공로가 있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같은 내용은 진린이 명 황제에게 이순신의 장재와 훈공을 보고할 때도 상주됐다. 진린이 남긴 이순신 영전에 올린 제문도 남아있는데 타국의 장수에게 행한 대우로서는 그 내용이 아주 절절하다.

진린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진린의 손자 진영소는 명이 청나라에게 멸망하자 벼슬을 내려놓고 난징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망명한다. 남해의 장승포에 표착했다가 조부 진린이 공을 세운 완도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해남군 황조리로 이주해 정착하고 광동 진씨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후 중국 광동에 남은 후손과 해남에 정착한 광동 진씨 후손들은 한국후손들이광동으로 가서 같이 제례를 올리고, 국내 지자체 이순신 축제에 참가하는 등 민간우호의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인 교류가 진행되고 있는데 완도로 보면 안타까운 것도 있다. 1598년 8월 진린과 연회중에 일본수군이 쳐들어와 승리한 고금도 해전과 고금도 묘당도와 덕동진이 한중일  국제전인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의 삼도수군통제영이자 조명연합수군의 사령부였음에도 모두 제대로 된 역사적 위상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린이 머물 당시 관왕묘로 세워진 지금의 충무사 변천사도 그 중 하나다. 일제 때 들어와 총독부가 1922년 훼철하려 한걸 고금도 유림이 계를 조직하여 관왕묘와 부지 1550평을 공동명의로 매입하여 보존했다. 그리고 1940년 무렵 총독부가 항왜 유적이라며 관우상을 부수어 바다에 던져버렸고 관왕묘 또한 훼철될 위기를 맞았을 때 고금도 사람들은 기지를 발휘해 관왕묘를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보존했다. 국권을 잃었을 때 백성들이 나서서 지킨 것이었다. 8·15 해방 후, 1947년 11월19일 이순신 기일을 맞이하면서 관왕묘에는 다시 제향이 올려졌다. 1953년에는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고 옥천사를 경외로 옮겼다. 그리고 1959년에는 정전에 아예 이순신의 영정을 모시고 동무에는 충무공을 보필했던 이영남을 배향했으며 1960년에 사적 제114호로 지정됐다. 진린이 세운 관왕묘는 이렇게 이충무공 사당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문화재청장으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는 지난 8월 고금도 충무사를 답사한 후 쓴 글에서 "이왕에 복원사업이 있다면 원래대로 복원하는 것이 공간의 진정성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중국인 관광객들도 찾아오고, 등자룡 장군의 후손들도 찾아온다는 것이다.

완도군도 물 만난 김에 군단위 예산을 벗어나 제대로 역사적인 고증과 연구,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국책사업으로 중앙정부에게 건의해야 할 것이다. 범군민들의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때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