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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와 ‘김만옥’

[완도 시론]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8.07.27 09:31
  • 수정 2018.07.2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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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진 / 소설가

초등교육을 받은 정도라면, 설사 땡땡이를 치고 다녔더라도‘장보고’는 알 것이다. 더군다나 몇 해 전에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전국적인 화제가 됐었으니, 혹 그가 시대착오적인 간첩일지라도‘장보고’라는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니 완도에서 사는 사람치고 그를 모른다면, 아마 그는 이제 막 완도에 발을 디딘 외국인노동자 정도일 것이다.

칼을 쥔 오른손은 힘차게 앞쪽으로 뻗고 교역물품을 쥔 왼손은 허리춤에 바짝 당겨쥔 채, 대한민국 최대 높이의 동상으로 서 있는 그는,‘완도 타워’보다 더 완도의‘랜드마크’인 것은 분명하다. 천이백 여년 전에 살았던‘장보고’가 가장 완도적인 인물이 되어 지금 저기 바닷가에 저렇게 용맹스런 기상으로 서 있는 것이다.

‘김만옥’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인 중에 동명(同名)이 있을지 모르나, 내가 말하려는 그 사람은 아니다. 그는 낙도인‘여서도’에서 났으니 변방인이었으므로 아는 이가 적을 것이며, 더군다나‘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 그저 ‘시를 쓰는’ 사람으로만 살다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거개가 그렇듯 생활고에 시달리다 시달리다 뻐체 스물아홉 청춘에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버렸으니 그의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교가 있던 몇몇을 빼면 아는 이가 거의 없으리라. 소위 문학을 한다는 나도 고향에 내려와서야 그를 알게 됐으니 그 사람을 아는 게 외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김만옥’은‘장보고’와 같은 줄에 쓸 수 있는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두 이름을 같은 줄에 쓰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강진 입구에는‘김영랑 문학관’이 있다.‘강진’하면‘김영랑’이고‘김영랑’하면‘강진’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곳에는‘김영랑’뿐 아니라 강진이 낳은 문학가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강진의 한 정신이 문학관에 또아리틀고 있는 셈이다. 이웃동네 해남에는‘땅끝 순례문학관’이 있다. 그곳 역시 해남이 낳은, 그리고 해남과 연고가 있는 문학인들의 한반데 모여 있다. 문학관을 둘러보며 그 동네들이 문학 쪽으로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게 된다. 이런 인물이 여기서 났구나. 이 땅과 이곳의 문화가 이런 인물을 키워냈구나. 그러니 이쪽 사람들이 자긍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구나.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며 조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그곳을 돌아나온다.

높은 건물이 올라가고, 그 아래로 비싼 차가 굴러다니고, 그 차들이 고급 음식점들에 줄지어 서고, 그리고 그것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틀림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들과 함께 있어야 할 인간의 정서와 관련된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 환경을 바람직하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신의 것들이 함께하지 못하는 물질의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결국 천박한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해상을 호령하던‘장보고’의 저 힘찬 오른손을 나는 존경한다. 그리고 그의 왼손에 쥐어진 동양 3국의 네트워크나 경제공동체에도 나는 경의를 표한다. 그의 거대한 동상을 지날 때마다 완도에서 대단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에 나는 강한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밤이면 오색의 불빛들이 찬연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건물들이 높이높이 올라가지만,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문학관 하나, 잘 꾸며진 미술관 하나, 강동을 주는 음악공연장 하나 없는 동네를 보면서 나는 괜히 쫄아드는 나를 발견한다. 건물들이나 차들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지만, 차림새는 그리 세련돼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문학관을 돌며 나누는 대화, 미술관을 돌아보는 뿌듯한 듯한 표정, 그리고 공연장을 나서는 만족스런 얼굴을 보면서, 그리고 알게모르게 그들의 어깨 위에 얹힌 자긍심을 보면서, 나는 새삼 내가‘뻘놈’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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