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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에 대한 각별한 애정 보여준 백범 김구

[3ㆍ1 운동 100주년 특집] 1. 백범 김구는 고금 충무사를 왜 찾아왔나?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9.02.15 12:35
  • 수정 2019.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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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검명인 "바다에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뜻을 알아준다"는 의미를 백범은 직접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졌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대한독립”이라 답하겠다던 백범 김구. 그는 백범일지에서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으며, 미래에도 이 소원을 달성하려고 살 것이다"고 했다.

허나 처음부터 그가 민족지도자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과거를 보아 관직으로 입신공명을 이루고자 했으나 조선 말기, 실력보다는 돈과 재물 등 부정이 판치던 때라 번번이 낙방했다. 그런 그를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관상쟁이나 풍수쟁이로 살기를 바랬다. 건데, 그도 공부를 해보니 자신의 얼굴상은 가난뱅이 상에다 살인자의 상이고, 온갖 풍파를 겪고 감옥에 갇힐 상이었다. 이에 탄식하며 방구석에 책을 내팽개치게 되는데, 그 순간 마지막 장에 쓰여진 글귀를 보았다.

'觀相不如身上 身上不如心相' (어찌 관상이 신상보다 낫겠고 어찌 신상이 심상보다 나으랴!)
제아무리 관상이 좋아도 건강한 육체에 미치지 못하고, 아무리 육체가 건강할지라도 바른 마음만큼은 못하다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백범은 자신의 마음을 곧고 바르게 가꾸기로 결심하고 1893년(18세) 동학에 입교하면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황해도 해주성 공격의 선봉장으로 활동했다.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백범은 본명을 버리고 김창수로 개명,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뒤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이후 고종 황제의 특사령이 내려졌지만, 일본 공사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하자 감옥 바닥에 깐 박석을 들쳐내고 땅을 파 탈옥에 성공, 남도로 피신하게 되는데, 이때 완도를 찾아오게 된다. 승려 신분으로 위장하기 위해 머물렀던 공주 마곡사를 시작으로 광주, 함평, 목포, 장흥, 보성, 그리고 충남, 전북 등을 찾아 자신의 생애에 첫 번째 도망자 신분으로 살았다.

목포를 떠난 청년 백범은 해남 화산면 관두산 밑의 관동마을을 둘러보고 해남 이 진사가 주선한 배편으로 고금도 충무사로 오게 된다. 김구가 삼남 지역을  방문했던 이유는 그가 탈옥자 신분이었기도 했지만, 동학 접주로서 여느 지역보다 활발했던 동학혁명의 자생지가 호남에 있었고 곳곳에서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심리 등이 작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백범의 사상적 기반은 동학에 기초했는데,  앞으로 청년 백범이 민족지도자로서 공리적 희생과 역량을 펼치게 될 역사적 무대를 접했다.
그곳은 바로 고금 충무사.

백범의 삼남 방문 중, 섬지역 방문은 고금도 충무사가 유일하다. 특별히 배편까지 마련해 고금도를 찾았다는 건, 그 만큼 이충무공에 대한 위대함과 숭고함 그리고 신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임진난 발발 1년 전, 그 허약한 조선 수군을 최정예 수군으로 키워내 40만 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과 맞서고,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해야했던 지휘관의 진정성까지 시험 받으면서 의금부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설상가상 그로 인해 어머니까지 잃고, 원균의 칠전량 패전으로 조선 수군이 전멸되다시피한 상황에서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나가 울돌목에서 왜수군 133척과 싸워 대승을 거뒀지만 왜군들의 보복으로 셋째 아들 이면을 잃기까지.

이후,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게 되자, 조명연합수군의 총본영을 고금도에 세우면서 순천만과 광양만 일대의 왜수군을 격파하며 금당도 대첩을 거두고 거금도 해전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조일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 관한 전술 전략을 이곳 본영에서 진두지휘하면서 승리의 방점을 찍고자 제하장수와 군사들과 결의했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동서고금,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 역사가 뒤바뀌는 선례는 없었다.
더구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1598년)에서 왜군과 싸우다 적의 유탄을 맞고 순국하자 그 유해를 80여일간 봉안한 월송대 앞에 섰을 때 백범의 심정이란.

더욱이 상국이라는 명나라 장수까지 이충무공을 크게 흠모하며 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비석까지 보았을 때의 청년 백범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도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지금, 자신과 맞닿아 있는 처지와 주적인 일본에 대해 자신이 어떠한 길을 걸어야 하는지, 이충무공을 통해 보고 있었고, 여기에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400여년전 이순신과 진린의 우정을 이야기하며 한.중 긴장관계를 풀어가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중국 생활에서 그들과 우호를 어떻게 다져야할지까지, 이충무공의 백의종군과 조선수군 재건 때처럼 가장 절박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인생항로를 담아 냈다.

그러며 후일, 백범일지에 "고금 충무사를 두고 가장 감명 깊은 곳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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