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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로 시작하는 서툰 연애편지

[에세이-고향생각] 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15 05:41
  • 수정 2019.03.15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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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 집 우편함에는 매일 수 십통의 편지들이 빽빽하게 낑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학생중앙 펜팔 란에 언니의 사진과 이름, 주소, 취미 등이 실린 후, 전국 각지로 부터 친구가 되고 싶다는 사연들이 앞 다투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수 많은 편지들 중에서 몇 명을 선택해 언니가 답장을 보냈는지, 아니면 펜팔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 년이 넘도록 매일 매일 날아오는 편지들을 지켜보던 나에게는 적잖은 호기심과 부러움이 아닐 수가 없었다.

 미지의 소녀에게...... 로 시작하는 서툰 연애편지 같은 글들을 언니가 나에게 보여주었고 우리는 그 어색함에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남들보다 이 년이나 늦게 완도여고에 들어갔지만 언니 주위에는 늘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거의 날마다 집으로 놀러오는 친구들을 위해 언니는 가제 손수건을 깔고 하얀 풀빵을 쩌 냈는데, 잘 부푼 빵을 뜯어 설탕에 쿡 찍어먹는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그 무렵 즈음에 약산에서 홀로 지내시던 할머니가 집안 일을 도와주신다고 오셨는데,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중풍으로 자리에 눕게 되셨다. 아버지는 그러한 상황을 비관하셨던지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드시는 날들이 차츰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만약, 영숙언니가 없었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암담했었을까?'  그때 언니는 나의 든든한 버팀목처럼 늘 모든 일들을 기꺼이 감당했고, 때로는 학교를 결석까지 하면서 대 소변으로 찌든 할머니의 이불빨래와 집안 일들을 하기도 했었다. 철없던 나는 그렇게 힘든 언니를 돕기는 커녕 친구들이랑 어울려 밖으로 쏘 다니기에 바빴다. 실컷 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언니는 나에게 말했다.

"언능가서 아부지 어디서 술 드시는지 찾아봐라" 동네 구멍가게나 선술집을 기웃거려 나는 아버지를 찾아 엄마를 대신해 온갖 잔소리를 해 가며 아버지를 모셔왔었다. 그리고 밤이면 태평하게 쌕쌕 잠을 자는 내 곁에서 언니는 늦은 밤까지 깨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여고에 입학 했을 때에 언니는 교련 선생님과 함께 학교 정문에서 신입생들이 뱃지나 이름표 등을 제대로 부착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서도 언니는 내신 1등급이었기에, 선생님들은 학비가 저렴한 교육대학으로 진학하라는 조언을 해 주었지만 언니는 스스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있었다. 왜 그랬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에 대학을 보낼만큼 넉넉한 돈은 당연히 없었다. 어쩌면, 언니는 너무 지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나이에 힘에 버거운 시련들을 홀로 묵묵히 감당했기에, 더 이상 공부하기위해 경제적인 어려움과 씨름하고 싶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졸업 후 언니는 취직을 했고, 아버지가 위암으로 꼬챙이처럼 말라 세상을 떠나실 무렵에 언니랑 교제 중이던 지금의 형부를 불러 언니를 부탁했던 것을 아련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그 시절을 떠 올리며 언니에게 참 고마웠다고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언니가 내게 그렇듯 고마운 존재였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로 살아 왔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철없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그 어린시절, 묵묵히 버팀목으로 내 곁을 지켜주었던 언니를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 거센 비 바람을 온 몸으로 견뎌낸 흔적들이 언니의 심장을 관통하여 원인을 알 수 없는 언니의 지병이 된 것은 아닐까?
 

배민서 / 완도 출신. 미국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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