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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장보고시대 차문화(4) 정신문화의 초석

[완도차밭,은선동의 茶 文化 산책-54] 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15 05:48
  • 수정 2019.03.1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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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찬 / 원불교 청해진다원 교무

청해진 장보고 시대, 천 년 전 아득한 시공 너머의 상황들을 추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퍼즐 맞추듯 맞추어 보지만, 상식과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비일비재 하다. 또한 정사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료 역시 오히려 역사적 진실의 왜곡도가 만만치 않다. 나아가 철저히 말살되거나 왜곡 편수된 사료들은 가히 우리 민족 고유의 특성을 살피기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역사적 문화적 희미한 특성위에 차문화를 올려놓고 다시금 정신문화에 근거한 차문화 콘텐츠를 운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모른다.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불모지이며,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도 뻔히 알면서 누군가 해야 하는 그 일을 조금은 먼저 알았다는 이유로 필자 역시 부족하지만 그 시대적 소명을 다시금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역사적 사건들의 객관적 나열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석하고 재해석 해 나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일은 우리 완도가 필연적으로 풀어야 할 과업이며, 장차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자 숙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청해진시대가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무게는 바로 고려 500년 역사 전체에 미치는 차문화의 단초이자 근간이라고 하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의 차문화가 곧 고려의 정신세계 전체를 대변한다 하여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5교 9산과 선종의 발전 과정과 차 문화. 국가의 의례에 불교의 의식적 형식이 도입되고, 그 의식의 주요부분 중 하나가 헌다와 진다의례였음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는 왕후장상으로 부터 민초들에 이르기 까지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 전반에 걸쳐 유행되고 있는 시대의 정서와 문화와 집권자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 그리고 문물과 인적 교류를 바탕으로 한 문화적 충돌 및 다양한 교류가 곧 청해진의 장보고 시대에 가장 주목해야 할 역사적 가치이고, 그 가운데 차는 단연코 최고의 문화상품 중 하나이며, 화려한 차문화 절정의 근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고려의 뇌원차와 송나라의 용봉단차의 교류는 차문화 교류의 상징처럼 표현한다. 즉 고려의 상대 교역국가였던 송나라 역시 중국의 역사속에 차문화 발전이 가장 화려하고 절정을 이루었던 시대였다.

이는 나말여초의 선종에 기인한 다선일여 사상이 고려말 백운 이규보에 의해 다도일미 사상으로 사대부에 이르기 까지 보편화 되었으니, 고려의 전 시대에 걸쳐 정신문화로써 차문화의 도도한 물결은 쉼 없이 이어지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이 국시가 됨에 따라 불교가 쇠퇴하여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자 차문화의 주춤 현상이 있었으나 사회 전반에 걸쳐 차문화는 면면히 흘러 다산과 추사와 차의 성인으로 숭앙받는 초의에 이르러 다시한번 절정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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