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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에 온 이들 눈물 또한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에"

[청년 완도 특집] 1. 허사겸 이장의 항소이유서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9.06.10 04:33
  • 수정 2019.06.10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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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 소 이 유 서>
● 사건  1883년 11월 18일 가리포 민란
● 원고(피항소인)  조선국 조정과 이상돈
● 피고(항소인) 허사겸. 1842년생. 주소: 완도군 군외면 당인리 존위(이장)

본 피고인은 먼저, 인간을 사람으로 정의하는가?를 자각한 이후 끊임없이 물어왔던 질문,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묻게 될 질문으로써 본 항소 이유서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아, 우리에게 첫숨을 불어넣어준 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를 지켜온 건 무엇이었으며, 우리의 숨결과 우리의 생명은? 또, 우리는 어떻게 5천 년 또는 1만 년의 역사를 이어오게 되었을까? 이토록 우리의 삶이 풍요로울 수 있게 일깨워 준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러한 물음 뒤에 떠오르는 건, 역시나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그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겠죠.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어머니! 저 찬란한 붉은 태양과 온유한 달빛 속에서 그 장엄한 숨결과 갸륵한 정성으로 우리를 지켜주었고 우리를 키워주셨지요! 그것은 앞으로도 결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되는 질문.
이 땅의 소외받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이 땅의 아파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이 땅에 오는 이들이 또 다시 아파하고 또 다시 소외된다면?
아버지의 눈물이 아버지만의 눈물이 아니듯, 어머니의 눈물이 어머니만의 눈물이 아니듯, 이 땅에 오는 이들의 눈물 또한 그들의 눈물만이 아니기에 그 모두의 눈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우리 속에서 나는 또!

그러한 질문이 지금은 민란 쯤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후세엔 '계미의거'로 불리게 되는 본 사건을 주도한 이유였습니다.

전인적 인간으로 가는 길은 현상에 끊임없는 의문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며 실천으로 이름하였기에 그건, 한 마을의 지도자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철학적 근거가 되면서 더불어 제 삶의 본질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무릇, 한 국가와 나라 그리고 지역의 창조적 발전은 서로간 소통과 화합의 인문 정신을 기본으로 각 시대와 조화를 이뤄왔습니다.

그 면면히 흐르는 선조님들의 정신과 마음, 숨결이라 하는 그 속에는 지성과 법 보리 보단 힌 시대의 소명과 인간이 살아가야 할 본질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타인을 위해 나를 내놓은 인성, 즉 공리적 희생이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조선국의 건국 이념이자 앞으로 다가올 미래 후손들이 계미의거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지금의 내가, 앞으로의 내가!  다시 말해 지식에 대한 믿음으로써 지적 계산의 영역 속에서 함몰되지 않고 그 영역 밖에 있는 신비롭고 헤아릴 수 없는 공의적 삶을 선택함으로써! 곧, 너의 눈물이 나와 같은 삶이라는 그 무한히 행복한 스스로의 삶을 자신으로부터 추방되지 않게 본질과 정체성을 바로 세워 서로의 다른 가치와 문화를 존중하며 그 조화 속에 인류공영의 큰 뜻을 만들어 가는 한 사람의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작금의 세태는 가치 질서가 실종된 채 소위 관료는 백성들의 가렴주구가 되어  민은 관에게 수긍하기 어려운 영원한 투쟁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또, 서로 다른 가치들의 영원한 투쟁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가치나 의미란 부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어떤 앎이 우리는 물론 조선에게 의미가 있느냐?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더불어 조선의 정의(正義)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써, 대부분의 법이 포함하고 있는 이념과 일치합니다. 본 사건에 대한 본 피고인의 행동의 바탕은 조선의 법치적 이념에 따라 인치해야하는 관료의 부정한 법리적 영역을 정의의 올바른 뜻으로 확립하고자, 그래서 그 소외되고 아파하는 이들이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갖기 위한 조선 국법의 정의와 본질을 구현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소명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궁극의 조선이 가야할 법치이고 인치이며 자치라고 여겼습니다.

모름지가 한 지역을 대변하는 대표자에게 국가의 법과 관료의 법, 공동체의 법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넘어 한민족 5천년 또는 1만년, 그리고 향후 우리 후손들이 맞게 될 생활면 전체에서 역사적 사명과 향촌의 자치,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또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가의 문제였음으로 그 문제가 크던 작던 해결 되어야한다는 한 인간의 본질적이고 실존적 물음에서 본 사건은 발로하였음을 밝힙니다.

끝으로 1심에서도 밝혔듯 지금 이 순간부터 본 피고는 나의 과거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질 것이며, 내 문제에 대한 책임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 이하 생략.  

1883(계미)년 탐관오리 벼슬자리를 돈으로 산 가리포첨사 이상돈이 백성을 수탈하는 도구로 삼자, 군외면 당인마을 이장인 허사겸은 주민들과 함께 ‘계미의거’를 일으킨다. 허사겸은 ‘계미의거’에 참여했던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1884년 강진 병영에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고, 그 책임은 내가 지노라" 며 28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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