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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다운 완도 ‘완도의 정신’ 청년이 지켜주었으면...

[완도 논단] 김정호 / 본보 발행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6.10 05:12
  • 수정 2019.06.10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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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 본보 발행인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어떻게 사느냐를 말한 허사겸
3.1 만세운동,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바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인데, 이 보다 10년 앞선 1883년 완도.
군외면 당인리 이장이었던 27세의 허사겸 선생은 가리포 첨사 이상돈의 가렴주구와 학정을 견디다 못해 민란을 일으켰으며 가리포진을 점거하고 이상돈의 죄상을 밝혀 섬 밖으로 추방한 후, 향도청을 설치해 자치행정을 실시했는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만든 집강소의 시초고 지방자치와 민주주의의 효시로 볼 수 있다.
그 보다 더 빛나는 건, 28살의 허사겸이 죽음 앞에서 했던 말이다.
 "이 모든 일은 나에게서 비롯됐고, 그렇기에 그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며 나는 그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인간에게 허락된 유한의 시간은 삶의 끝에 자리한 불변의 진리를 조금씩 앞당겨오기 때문에 죽음은 삶을 떨어뜨려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죽음은 삶의 흐름으로 가져오는 결과로써 보든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든, 죽음은 우리 삶의 영역 안에 자리하는데, 허사겸의 죽음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존재의 의미를 물었던 ‘나는 누구인가’, 공동의 선으로의 확장을 고민했던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완도 청년의 의(義)로운 행동, 완도사회의 깊은 파급력 안겨
허사겸 이후, 완도 항일운동이야 더 말 할 것도 없고,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만 보더라도 항일운동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본 사건에서 완도출신은 8명으로 광주출신 12명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장석천(29) 신지면 송고리 징역1년6월/문승수(25) 군외면 대야리 징역 1년/정남균(27) 약산면 장용리 면화상 징역 1년/유치오(24) 약산면 관산리 징역 1년/정석규(20) 소안면 비자리 징역 1년/김홍남(21) 청산면 당락리 광주고보학생 징역 1년/박노흥(24) 고금년 청용리 징역1년/황상남(21) 군외면 신학리 징역1년/김향남(24) 청산면 여서리 징역 8월 등 하나같이 20대의 청년들이다.
또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가 열리고, 보름이 지나 의원들은 미군용기의 독도 폭격 사건을 다루게 된다. 전말은 미군용기 9대가 울릉도를 돌다가 미역을 따는 우리 어선들을 향해 폭격을 퍼붓어 어선 11척이 뒤집히고 14명이 죽는 참사다.
이때 제헌국회의원이던 완도출신 김장렬은 발언권을 얻어 “우리민족이 이같은 박해를 당하고서도 국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노예생활을 자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위자료와 선박피해에 대한 배상을 미국에 요구해야 하고 국제적으로 여론을 환기시켜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어떻게 보면 아직은 미국측에 종속된 한 국가의 의원이 참으로 의기롭고 결기에 찬 말을 했다.
그러했던 김장렬은 1920년 5월 창립된 완도군 청년회의 초대 총무를 맡아 지역 청년활동을 이끌었고, 보성중학교 재학 중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돼 퇴학 처분을 받았다.
제헌의원에 당선 된 후에는 헌법기초의원을 선출하는 전형의원(각도별 1명 선출)에 선출된 바 있으며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반민특위 특별재판관직을 내놓았다.
이러한 완도 청년들의 의(義)로운 행동은 이어오는 후배들과 완도사회에 깊은 파급력을 보여주면서 419혁명과 518혁명, 87완도민중항쟁으로 이어져왔다.

지역사회 갈등 중심에 청년 청년정신 완도의 본질과 핵심
그런데 최근 지역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 하나같이 지역 청년들이 관련돼 외지 업체들을 끌어 들여 거마비 명목이나 또 다른 사업 이권을 챙긴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 오고 있다.
지역경제가 오죽했으면, 청년들이 살아갈 경제구조가 얼마나 녹녹치 않으면 그랬을까 싶어 기성세대로서 성찰을 하게 되는 대목이지만, 한편으론 우리 완도가 어찌해 이리 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애달프기만하다.
공동체라는 것은 분명, 공공선이 바탕이 되어야 하면서 그 사회의 본질과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물질의 성장과 풍요보단 공공의 선을 위한 도덕성을 하루속히 회복하는 것이다.
청년은 지역의 희망을 상징하는 보배로써 지역을 빛나게 하는 영광의 춤이며 젊은 완도를 창조하는 힘이다.
왜?
우리는 과거가 위대했음을 그리고 미래가 위대함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양극은 불가사의하게도 현재의 시간 속에서 서로서로가 이어져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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