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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물에 두 번은 못 들어 갈지라도

[완도 시론] 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9.27 10:03
  • 수정 2019.09.2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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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진 / 소설가

생로병사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다. 생명 있는 것들은 그것이 살아 있는 한 부단히 유동하는 과정에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을 때, 그는 ‘우리’라는 존재의 일회성뿐 아니라 강물의 일회성도 포함시켰다. 우리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강물 역시 같은 대상을 두 번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에 들어가는 강물이 그전의 강물일 수 없듯, 나중에 받는 대상이 그전의 대상과 동일할 수는 없다. 아주 짧은 동안이라 해도 그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그만큼 다른 존재가 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 없는 존재라도 그것이 일정한 상태로 멈추어 있을 수는 없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는 해도, 달도, 바위도 다 변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가 아니라,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새롭다’가 맞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대상은 더 낡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분명 그 이전과는 다른, 분명 새로운 형태의 것 아니겠는가. 자연이라는 전체성의 측면에서 보면, 개별적 사물은 소멸을 향해 가지만, 그 소멸이 있어야 새로운 존재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니, 소멸이 곧 생성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것을, ‘만물은 흩어져서는 다시 밀려오고, 밀려와서는 다시 흩어져 간다’며, 만물유전(萬物流轉)이라 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신뢰하든 않든, 불교의 윤회설을 믿든 안믿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나서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는다. 흩어졌다가는 다시 밀려오고 그랬다가는 다시 흩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연계 전체의 현상이지 개별적 존재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는다. 세상에 형상으로 있는 것들은, 설사 형상으로 있지 않는 것들일지라도, 다 존재했다가는 사라진다. ‘다시 밀려올지 어떨지’는 ‘다시 밀려와 본’ 개별적 존재가 없으므로 아무도 증언해 줄 수가 없다. 죽음은 죽음마저 죽인다.

내 부모에게서, 또 내 위의 연배에게서, 또는 먼저 떠난 자들에게서,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본다. 인간 종(種)에 해당하는 이상, 그가 어떤 위대함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운명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어간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살고 있으며, 그 ‘부조리’만이 진실이다.

중환자실이나 요양원에 가보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생명이 붙어 있으니 살아 있다 하겠지만,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좁게 보면 병상에 누운 그들만 극락강을 건너고 있는 듯하지만, 넓게 보면 사실 우리 모두는 지금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강물 위에 떠 있다. 부인하고 싶어도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 사실 밖에 있는 존재는 이미 강을 건넌 자밖에 없다.

죽음이 삶을 살게 한다고 한다. 소멸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삶이 훨씬 삶다워질 수 있다는 얘기일 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가 아니라, 함께 산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리고 함께 잘사는 길을 고민할 때, 우리네 일회성의 삶은 더 가치 있어지는 것이겠다.

자연의 기운 때문에 조금은 엄숙해지고, 주변의 현상 때문에 한번쯤 떨어지는 것을 생각해보는 계절이다. 소멸의 운명을 깨닫고, 그것을 삶의 자세로 전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는 아닐까. 언젠가는 떨어져야 하는 같은 운명인 존재들에게, 그 애드러움 때문에 손길 한 번 더 주어보는 때는 아닐까. 혹 주변에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또는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기 요양원에 맡겨둔 사람이 있다면, 얼른 가서 손 한 번 잡아주는 것은 어떨까. 당신과 나는 같은 운명의 존재였다고,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은 어떨까. 쓸쓸해서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저 잎사귀 지고 내년이면 거기에서 다른 잎사귀로 나올 걸 생각하면, 쓸쓸함이 꼭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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