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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열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10]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0.18 13:15
  • 수정 2019.10.1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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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속의 악한 기운을 누르려고 묻은 지진구(地鎭具)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경주 계림 북쪽 신라시대의 건물 유적지를 조사하다가 땅 속의 악한 기운을 누르려고 묻은 지진구(地鎭具) 합을 수습했다.

▲ 경주 황남동 금입택 유적에서 발견된 875~886년대의 황칠 덩어리.

합의 안에는 딱딱하게 굳은 신비의 도료라는 황칠 덩어리가 있었다. 더구나 이 황칠 유기물질에서 전남 완도산 황칠에서만 나오는 베타셀리넨(β-selinene) 성분이 검출되었다, 이 결과를 보면 신라의 금입택에 칠해진 도료가 장보고 청해진의 주요 물산이었던 완도 해안 일대에 자생하던 황칠나무에서 채취된 황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신라 귀족들이 금처럼 황금빛을 띠면서 벽사(辟邪)의 기능까지 있다고 여긴 황칠을 자기 집에 칠했고 그런 금빛이 나는 집이 곧 금입택이었던 것이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851년 혁파 되었지만 그 해상 제국 청해진의 여파가 당시까지도 신라사회 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이를 증명하는 것이 황칠이다.

장보고의 청해진 덕분에 신라의 상류사회가 그 혜택을 최대로 누린 시기가 바로 헌강왕대로 여겨진다. 이러한 태평성대는 수도인 경주시 일대 귀족들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그나마 불과 5년후에는 지방의 세금이 오지 않아서 경주의 조정은 궁핍에 빠지고 망해간다. 이는 상업으로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인 장보고의 청해진에 대해 부정한 댓가를 치룬 것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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