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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완도인 장보고 대사Ⅰ

[완도신문-(사)장보고연구회 공동기획-청해진대사 장보고] 추강래 / (사)장보고연구회 사무국장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0.11.27 11:21
  • 수정 2020.11.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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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출생에 관한 기록은 그가 신라인이라는 번천문집의 자료 외에는 별로 없다. 특히 삼국사기 장보고, 정년 전에서는 ‘향읍과 부조父祖를 알 수 없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번천문집이나 삼국사기 등 여러 역사서를 참고로 그의 고향이 완도이었음을 밝힌다.

첫째 중국 역사서에 “두 사람은 고향이 같다‘는 기록과 ‘고향에서 죽는다면야’라는 고향에 대한 기록이 있다.

번천문집(권6 장보고 정년)에 의하면 “장보고는 이미 그 나라에서 귀한 사람이 되었는데, 정년은 당나라에서 관직을 잃고 굶주림과 추위를 무릅쓰며 사수 연수현에 있었다. 하루는 정년이 연수수장 풍원규馮元規에게 말하기를, “나는 동쪽(신라)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풍원규가 말하기를, “그대와 장보고와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말리자, 정년이 말하기를, “굶주림과 추위에 죽는 것이 싸워서 쾌하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서 죽는 것이랴.” 하고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만났다. 장보고는 함께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겼다. 

정년은 당 문종 개성 3년(838)에 회남에서 바다로 북로를 따라 신라로 돌아가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투신한다. 여기에서 정년은 “하물며 고향에서 죽는다면야”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청해진이 그들의 고향이었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청해진 설진시 사전 조사나 자문도 없이 귀국과 동시에 흥덕왕께 설진 할 장소를 곧바로 주청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에는 어느 섬이라도 진을 설치하기 좋은 섬이 많다, 그런데도 완도를 선택하였다. 그것은 당나라로 건너가기 전 이미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결론이다. 모르면 사전 답사를 하거나 주위의 조언을 듣고 적합한 장소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보고는 귀국하자마자 서남해안의 여러 섬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흥덕왕에게 설진 할 장소를 명확히 주청하였다. 그 많은 후보지를 제쳐놓고 완도를 선택한 것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던 즉 고향이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셋째 우리나라 역사서에 ‘해도인’이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성왕 7년에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둘째 왕비로 삼으려 했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간諫하여 말하였다. 
 “부부의 도리는 사람의 큰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하夏나라는 도산씨로 인하여 흥하였고, 은殷나라는 신씨로 인하여 번창하였으며, 주周나라는 포사 때문에 망하였고, 진晉나라는 여희 때문에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러한즉 나라의 존망은 여기에 있는 것이니 신중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사람’인데 그의 딸이 어찌 왕실의 배우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왕이 그 말을 따랐다”라고 적고 있다.

또 그 기록을 보면 여식의 납비 문제에 관하여 조정 대신들의 유일한 반대가 “해도인” 즉 섬사람이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궁파는 아주 미천한 사람이오니 왕께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다.”라고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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