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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년전부터 전복을 먹었던 완도인들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1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4.23 12:53
  • 수정 2021.04.2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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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문화는 삶이자 생명인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가 없다면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며 나아가 삶을 영위하는 문화 자체를 유지하고 계승하는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도 역시 소멸한다.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
완도는 정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다. 지금도 살고 있지만 먼 옛날 6천년 전부터 선사시대 신석기 문화가 존재한다.

 

단군이 개국하기 1,500여년 전에 이미 완도에서 일어난 일이다. 완도 체도에서 50km 떨어진 여서도란 섬에 신석기 문화가 존재한다. 여서도(麗瑞島)는 완도군 청산면에 속하는 섬이다. 그 섬에 지금으로부터 6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2005년도에 발굴된 여서도 패총에서 6천년 전에 신석기 시대인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낚시도구며, 질그릇, 각종 석기류, 토기류 등이 발견되었고 주목할만한 것은 전복 껍데기를 비롯하여 패총과 어류의 뼈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완도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강력한 물증이다. 풍부한 해산물로 인하여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음을 증명한다.
6천년 전부터 완도는 전복 등의 해조류와 각종 어류을 포함하여 먹거리가 풍부했다는 것이다. 완도 본도를 비롯 고금도 등에는 고인돌이 널리 산재해 있으며 도서지역에서는 가장 많은 고인돌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 완도이다. 더군다나 본도에서 멀리 떨어진 여서도에서 신석기 시대의 석기들과 패총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완도가 정말로 살기 좋은 지역이었음을 기록이 없더라도 분명하게 말해주는 증거인 것이다.

 

역사책에 기록이 없다고 완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기록이 없었어도 완도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활발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기록이 없다는 것일 뿐, 기록이 없어도 완도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역이었다는 것을 완도 각지에 산재한 고인돌과 전복 등의 패총이 이를 여실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다양한 신석기 시대의 토기뿐만 아니라 각종 낚시 도구와 제주도 현무암이 발견되어 여서도가 신석기 시대 남해안과 제주도를 잇는 어업전진기지이자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교두보가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토우(土偶)와 멧돼지와 사슴, 고래 등 각종 동물뼈까지 발견되어 신석기 시대부터 완도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문화를 간직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잘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하게 잘 수 있는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완도에 대한 역사에서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어떤 기록보다도 분명하고 나아가 확실한 물증인 것이다. 곧 사람이 살 수 있는 물적토대와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은 구성원 내에 소통과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험한 바다를 헤치고 살아나가야 했던 완도사람들이 선사시대에 이어 오늘까지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격리와 소외와 단절이 아니라 바다를 통한 인적, 물적 소통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새롭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완도는 이제까지 계속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또한 유지하기 위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문화가 있었기에 역사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서도는 기록에는 없지만 물증으로 증명하고 있으며, 그러한 여서도의 문화가 층층으로 쌓여져 청해진에 이르고, 가리포진에 이르러 오늘 현재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도도한 역사의 물결이자 흐름이다. 한반도에 존재하는 섬 중에서 어느 곳도 완도만큼 화려한 과거를 가진 곳이 없다. 완도는 그야말로 다른 곳과는 달리 인류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곳이다. 과거 신라시대 골품제 하에서 노비로 전락하여 신음하던 수없는 사람들을 보듬어 청해진제국을 건설하여 세계로 도약했던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곳이다. 자국민이 자국민을 노비로 삼았던 세계 최악의 신분제 하에서도 왜구들과 일선에서 맞서 처절하게 싸우면서 이 땅을 지켜냈던 호남제일번이 완도였다.


  기록으로 나타난 완도 역사의 결정판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이다. 828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제국을 형성했다는 당나라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일본 엔닌(圓仁)의 기록에서 완도는 아주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여서도에서 시작하여 고금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및 전복 패총, 토기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이 풍족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오래전부터 만들어졌고, 이를 유지하고 전승했다는 증거 곧 완도문화가 존재했고 그 문화의 토대 위에서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토대 없이 하루아침에 우연히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다 그만한 기반이 있었기에 장보고가 완도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완도의 찬란한 문화의 역량에는 바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이 확실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서도 패총이 말해주고 있으며,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이 말해준다. 다시 역으로 생각하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물적토대와 문화기반이 없이 청해진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완도의 물적 기반, 즉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문화가 청해진제국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바로 완도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문화 기반이 자체적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있었다는 것이고 그 역량이 축적되어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이다. 이유와 원인이 없이 결과가 있을 수 없다. 이를 역사의 필연이라 한다. 역사의 필연으로서 완도, 다시 말해 완도가 우리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한반도를 선도하고, 나아가 세계를 선도하는 가치와 철학을 가지고 있는 곳이 완도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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