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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 등불이 되어

정지승의 완도, 어디까지 가봤니?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4.23 13:04
  • 수정 2022.01.0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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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문화 탐방기획 <薪智島 ③> 

 

유배와서 원교 이광사는 그의 자녀들과 신지도에서 함께 살았다. 큰 아들 긍익은 조선의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고, 둘째 아들 영익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조선 최초로 양명학 사상체계를 이룬 정제두의 학통을 계승했다. 그들의 활동에서 보면 원교 이광사가 그리다 만 잉어 그림을 완성시킨 <이어도>가 여러 의미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한다. 부령에서 낳은 여식은 원교를 특별히 잘 따라 이를 각별히 여긴 부친은 친히 글공부를 시켰지만, 당시 신분제도 때문에 서녀라는 이유로 그 기록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조선 태조부터 18대 왕 현종 때까지 일어난 사건을 왕조별, 시기별로 서술한 연려실기술은 조선시대 야사의 총서이다. 긍익은 42세 때부터 집필하여 30년에 걸쳐서 이것을 완성했는데, 서책에 자신의 견해를 거의 밝히지 않았다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입장을 보였다고하여 매우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로 조선의 역사를 서술한 조선시대 사서 중에서도 뛰어난 것으로 학계는 평가한다. 이처럼 신지도에서 일궈낸 원교의 사상은 조선의 선비들은 물론 그의 가족에게 전수되어 후대에 길이 빛날 우리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원교 이광사(1705~1777) VS 추사 김정희(1786~1856)


 원교와 추사의 이야기는 남도학(남도의 인문정신) 강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원교와 추사가 활동한 시대는 각각 다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문화관광해설가뿐만 아니라 역사문화 공부를 했다는 대부분 사람이 원교와 추사 이야기는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흥사 편액’과 관련한 이야기뿐이라니. 원교 이광사는 이미 학계와 사상가들 사이에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데도 유행에만 민감한 관광정책은 항상 겉만 핥고 있는 것이 한계인 것 같다. 그것은 지역의 문화자원을 빈약하게 만든요인이다.


 추사는 조선 선비문화와 사상가의 예술세계를 서슴없이 비판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매화 그림으로 알려진 우봉 조희룡의 그림을 보고 ‘문자향, 서권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둥, 선운사 백파대사 이긍선에게 쌍스런 욕을 퍼부으며 백파망증 15조를 쓴 서신을 보내 심한 모욕감을 주었다. 그런가하면 전주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보고 “장날 가서 내다 팔면 딱 밥벌이는 하겠소”라며 조롱하며, 원교에게는 조선의 글씨를 망치게 한다고 상상 이상으로  비판을 일삼았다.


 지난 2018년 원교 이광사의 <서결>과 추사 김정희의 <서원교필결후>라는 원교 글씨에 대한 추사의 비판 글이 나란히 국가의 보물로 등록됐다. “원교의 필명이 세상에 울려 빛나고 또 상좌하우나 신호필선과 같은 말들을 금과옥조로 받들어 한결같이 그릇된 속으로 빠져 미혹을 깨뜨릴 수 없으며, 망령스러움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여, 그의 허물을 정도에서 벗어난 것이라며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강하게 비판했다. 추사는 청나라의 옹방강이 인정해준 해동제일(조선에서 제일이다)이라는 글씨 하나로 그 시대 어느 누구도 그를 뛰어 넘을 수 없는 ‘넘사벽’이 되어 있었다.


 그런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되고 자신의 지난 과오에 대한 용서를 빌 사람의 목록을 작성해 모두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해배되고 먼저 대흥사 일지암에 들러 오랜 벗인 초의선사에게 원교의 글씨를 대웅전에 다시 걸게 하고 급히 정읍 장터로 향하는데, 폭설로 인해 약속일을 하루 넘겨 백파선사를 끝내 못 만나고 백파가 거처하는 곳을 향해 큰 절을 올리고 한양으로 떠났다. 3년 후 백파선사의 입적소식을 듣고 선운사에 내려간 추사는 자신의 지난 과오를 백파의 제자들을 불러 사죄한다. 선운사 부도전에 추사가 쓴 백파율사 비문이 남아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제 후대 사람들에게 조선의 사회풍조와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풍을 평가할 자격이 주어졌다. 오늘의 사상가들이 원교 이광사가 이뤄낸 조선의 글씨 동국진체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시대를 뛰어 넘는 원교의 창의적 사고에 입각한 그의 예술정신과 서법으로 극에 다다른 그의 노력을 이제야 세상이 바로 알아준 것 아닐까.

학계에서는 금석학에만 몰두한 나머지 다른 세계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추사의 오만방자함을 이야기 소재로 삼는다. 추사 본인뿐 아니라 많은 사상가의 평가가 여실히 이어진다. 추사가 죽기 3일 전에 쓴 봉은사에 걸려있는 판전이라는 글씨가 있다. 부친인 김노경의 사망 후, 시묘살이 하면서 추사는 <판전>이라는 글씨 하나를 남긴다. 여태 자신만이 독보적 존재였다고 생각한 것을 반성이라도 하듯 그것은 원교의 서체를 따라 쓴 것이라고 한다.


신지도는 서로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 같은 곳


 신지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그간 45명의 유배객이 이곳을 다녀갔고 유배지에서 끊임없이 그들만의 사상을 펼쳤다. 그 중 특이할만한 인물로 시조의 대가 경평군 이세보, 종두법의 완성자 송촌 지석영, 정조의 하명으로 이충무공 전서를 집필한 석재 윤행임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신지도 주민들과 함께 서로를 비춰주는 등불 같은 삶을 살았다.


 지난 2016년 신지도의 유산을 완도의 문화자원으로 삼고자 (사)원교 이광사 기념사업회가 창립했다. 완도군은 신지도에 원교 이광사 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당초 유배문학관을 세우기로 했던 계획은 뒤로하고, 금곡마을 가는 길목 소재지에 원교의 거리를 조성한다니 늦은 감이 있지만 환영한다. 하지만 그 사업이 현 시대에 어울릴만한 자원으로 만드는 것에는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경화사족(한양과 근교에 거주하는 사족, 한양으로만 몰려 있던 조선시대의 학풍)이 주를 이루던 조선사회에 지방에서의 새로운 학풍이 세상을 뒤흔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싹트게 한 곳이 바로 유배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을 받들어 신지도에서 완도지역의 항일정신이 싹틀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후세들은 평가한다.


이제, 신지도 어느 곳에 있더라도 선구자들의 사상을 느끼고 배우며, 원교 문화의 거리가 우리정신문화가 살아있는 완도만의 독창성 있는 문화의 산실이 되기를 희망한다. 


정지승 다큐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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