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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에 핀 꽃 한 송이, 기억하는 5월의 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21 12:40
  • 수정 2021.05.2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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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억하고 그의 사상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쏟는 사람,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이다. 요즘 내가 즐겨 듣는 그의 강의에서 보면 그처럼 스승의 은덕에 감사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교훈으로 삼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가 마음속에 늘 그리워하는 스승은 누구일까? 그는 완도읍 죽청리 출신 응송 스님인 박영희다. 한학에 능통했던 29세 꽃다운 나이에 박동춘은 응송에게서 초의선사의 다법을 배웠고, 아직까지 대흥사의 다맥을 유지했다고 자부한다. 일평생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다. 그것은 각박한 세상에서 사람들 가슴속에 한 송이 꽃을 피어내는 일과 같은 것이므로.

 

 

‘응송(應松) 박영희', 왜 세상은 그를 외면했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은 응송(應松) 박영희(1893~1990)의 수제자다. 그는 “응송 스님에게서 초의차를 배웠고, 그로인해 인생에 날개를 달았다”고 차(茶)강의에서 늘 고백한다. 5대째 초의선사 다맥을 이어온 그는 전남 승주에서 차밭을 일구고 세계의 차문화를 연구하며, 해마다 차를 만들어 전국에 있는 다인들에게 초의차(草衣茶)의 다풍, 다법, 다맥과 그의 스승이던 응송 스님의 헌신적 삶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주로 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응송 박영희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1893년 전남 완도읍 죽청리에서 출생한 박영희는 1911년 대흥사로 출가한 후 공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중앙학림과 혜화전문을 졸업한 후 1937년 대흥사 주지로 취임해 20여년 두루 그곳에서 학문과 불법을 겸비한 학승이 되었다.

 


 응송 박영희(사진)는 1919년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그는 만해 한용운,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활동했다. 백범 선생께서 암살당했을 때도 경교장에 그가 함께 있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60년 이후 백화사에 머물면서 대흥사의 차맥을 잇기 위해 초의선사의 차와 선리연구에 매진했다. 이어 한국 다도를 복원하고 계승하는데 힘쓰다가 1990년 1월10일 광주에 있는 극락암에서 입적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애써 그를 외면했다. 왜 세상은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응송 스님 열반 25주년 추모문화제 학술세미나,
‘박영희’라는 인물의 새로운 평가를 시도했다

 

 특정 사실 하나만 부각시켜 한 사람의 일생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일을 우리는 종종 본다. 응송 스님도 마찬가지다. 1950~60년대, 한국불교계의 정화운동은 승려 신분으로 결혼했는가 여부로 그 기준을 삼았다. 얼마나 불심이 깊은지, 불교교리를 깊이 이해했는지, 포교를 열심히 했는지는 의미 없었다. 쇠락해진 불교계를 일으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던 만해 한용운의 뜻에 따라 취처했던 응송 스님은 한국불교계의 걸림돌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불교정화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그로인해 응송 스님은 불교계에서 축출대상 인물이 된다. 그 이후로 응송은 대흥사를 나와 장춘동 백화사에 머무르면서 초의선사의 다법을 연구하고, 세상의 흐름에 관계없이 참선에 정진한다.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은 2015년 11월24일, 그의 스승인 응송 스님을 기리기 위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대처승’으로 낙인찍혀 한국불교계가 퇴출한 응송 박영희라는 인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응송 스님 열반 25주년 추모문화제에서 박동춘은 응송 스님 다법의 연원과 특징을 설파했다. 초의선사가 행했던 다법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구명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음을 그 자리에서 역설한 것이다. 
 


“응송의 다법은 초의에게서 연원한 것이다.”
박동춘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세미나에서 그는 응송의 다법이 초의에게서 연원한다는 것을 학술적 가치가 있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밝혔다. “응송 스님의 다법은 초의선사에게서 연원한 것이다.” 박동춘은 당당하게 자신의 견해를 펼쳐나갔다. 그는 “응송이 출가한 당시 대흥사에는 초의선사의 제자 범해 각안이 열반한 지 겨우 10여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 범해의 제자인 원응 스님은 대흥사에서 강학하며 후학을 기르고 있었고, 원응이 응송에게 사교를 가르쳐준 법사였다는 점, 그러므로 응송의 다법은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초의선사의 제자들에 의해 이어졌으므로 초의로부터 연원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제까지 응송 스님에 대한 연구는 초의의 후손으로 다법을 이었다는 점과 제다법과 탕법이 일부 알려져 왔으나, 그의 다맥을 이은 박동춘이 학술논문을 통해 그의 다법 전반을 살피고, 스승의 다법이 초의에게서 연원한 것임을 밝히는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세상의 기준은 애매모호하다. 서로 무리 짓고 거기에 규칙을 갖다 붙이면 무엇이든 평가가 이뤄지는 정치계 같은 혼란함이다. 지금 한국의 차계가 그렇다. 만약 응송스님이 없었다면 초의선사의 차맥이 그대로 유지되어 왔을까? 일반에 알려진 특정지역 녹차란 것도 따져보면 일본산 개량종이 우리차로 둔갑한 것이 아니던가. 다도(茶道)라고 하는 차 예절은 또 어떤가. 응송 스님은 일제강점기와 6.25의 혼란한 시대에 우리의 차문화와 <동다송>, <다신전>을 비롯한 초의선사 유품을 지켜냈다. 그리고 일지암 복원을 서둘렀으며, 초의의 다법을 깊이 있게 연구해서 젊은 인재를 찾아 그대로 전수했던 것이다.


스승에게서 배운 초의선사의 다법을 변함없이 이어가는 박동춘. 그가 스승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완도 출신”을 누누이 강조하는데, 거기에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는 세계의 모든 차문화를 연구하여 학술적 자료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한반도의 차문화가 완도와 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불현듯 나는 범해 각안과 응송 박영희의 출생지인 사정리(구계등)와 죽청리에 차밭을 가꿔서 우리 차의 맥을 잇게 한 이 지역 출신 두 다승(茶僧)을 기념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계속>

 

정지승/다큐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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