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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청자의 도래지는 청해진이다

정지승의 완도, 어디까지 가봤니?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29 11:34
  • 수정 2021.11.2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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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면 지인으로부터 대흥사 인근의 차를 선물 받는다. 그런데 차 마시는 일에 익숙지 않아서인지 매번 책상에는 묵은차가 봉지 째 쌓여있다. 일일이 손끝으로 찻잎을 따서 덖음해 만든 공력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에 “오늘은 꼭 차를 우려 마셔야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커피나 다른 음료처럼 다루기 편했더라면 ‘녹차’라고 부르는 차를 자주 마셨을까? 생각해보니 왠지 번잡스럽고 손이 가는 우리차는 그래서 점점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응송 스님이 차를 마셨던 모습을 나도 모르게 습득했던 것일까. 차 도구가 갖춰져 있지 않은 공간에서 나는 밥공기 두세 배 된 그릇을 찾아냈다. 끓는 물에 한옹큼 넣고 우려 낸, 그것을 응송스님의 무슨 ‘일탕법’이라했던가. 부담 없이 차를 끓여 큰 그릇에 담아내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호로록 호로록’ 차 마시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랬더니 지난밤 과음했던 탓에 부대낀 속이 후련해지면서 무척 효과가 있어 보였다.

 


민가에서는 오래전부터 차를 약용으로 사용했다. 고뿔에 걸리면 감기약으로 썼는데 야생차를 생산하는 하동지역에는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다고 한다. 조합된 재료들이 탕솥에서 어우러져 향을 품어내는 고뿔차가 있다. 돌배, 모과, 진피, 그리고 발효차가 함께 어우러진 약차를 민가에서는 오래전부터 즐겨왔는데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였던 것.
 

당나라 문인 육우가 다경(茶經)을 저술한 것을 보니 차의 종주국은 중국임이 확실하다. 다경을 차의 고전으로 부른다. 일반인에게 다경이 전해질 정도면 당대(唐代)의 차 문화는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시대 한반도를 통일신라 하대로 보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 선덕여왕 대부터 차가 있었다고 전한다.(삼국사기 권10, 흥덕왕 3년 12월) 흥덕왕대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김대렴(金大廉)이 828년 귀국 길에 차의 씨앗을 가지고 왔다.

흥덕왕은 신통한 명약 같은 차의 씨앗을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명령했다고 하는데, 이전부터 있었던 차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고 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온 이후부터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성행했다. 그래서인지 야생차를 생산하는 하동과 구례에서는 아직까지 차시배지를 놓고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9세기 , 신라에서 일어난 차문화는
장보고 상단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대렴이 차를 가지고 온 828년이 장보고(張保皐)가 흥덕왕의 명을 받고 청해진(淸海鎭)을 설진한 때와 같다는 점이 특이하다. 대렴이 당나라를 왕래하는 방법은 그 당시 해상교통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없다. 육상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백제나 고구려를 통해서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진한 이후 중국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장보고 선단을 이용했다고 전한다. 대렴도 장보고의 선단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그 시대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다구들이 많았는데,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입증됐다.

 

이러한 품목들은 결국 신라사회가 중국을 통해 차문화를 받아들인 것을 명확하게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당시 장보고가 활동하던 시대는 중국을 통해 신라에 새로운 차문화가 들어온 것으로 연결된되고, 새로운 차문화는 장보고 해상세력의 영향이 컸음을 입증한다. 장보고 선단이 주도하는 한중일 삼국의 무역이 불교문화와 연결되어 차문화까지 이어져 새로운 문화가 신라에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9세기, 신라에서 발생한 차 문화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장보고는 도자기술을 우리나라로 가져오기 위해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대담한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월주요는 중국 최고 수준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이다. 장보고는 신라에서 기술자들을 데려가 절강성의 월주요에서 기술을 익히게 한 후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데려와 해남, 강진 등지에서 청자를 생산토록 했다는 것. 이것은 청해진이 서남해안 일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세력이었음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청해진 장보고 추모다례제가 갖는 의미,
국제행사로 키워가는 과제 우리에게 있다.

 

 대흥사에서는 초의다례제, 화엄사의 연기조사 다례제, 모두 차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다례제이다.  인근지역 보성불교사암연합회 주관으로 열린 '충무공 이순신 호국 다례제'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해 수군을 재건할 시기 보성에서 군사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전쟁에 대비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마련했다. 이충무공은 고금도에서도 명나라 장수를 영접할 때마다 '접빈진다례' 의식으로 차를 접대했는데, 차를 접대받은 명의 장수들은 이순신의 호의에 감사함을 표해 차와 차구를 선물한 것으로 난중일기에 기록했다.

 


완도에서도 장보고 추모다례제가 열린다. 1200여년전 청해진을 건설하고 동북아 해상무역을 호령했던 해상왕 장보고대사 추모다례제이다. 헌화와 헌다, 전통무 등이 다채롭게 이어지는 행사는 사단법인장보고연구회 주관으로 개최하는데, 학계의 공통된 의견에 근거하여 매년 11월 18일을 장보고대사 추모일로 정하고 다례를 올린다. 지난 2000년 5월 사단법인장보고연구회가 창립되어 20여년간 지역에서 장보고 관련 행사를 지속적으로 펼쳐오다가 지난 2011년부터 장보고 추모다례제를 개최했다.


 차를 헌다한 것은 제사의 유래, 명절에 ‘차례 지낸다’는 어원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차를 구하기 힘든 시대에 제례의식에는 차대신 술과 음식으로 바뀌었지만 불가에서는 여전히 차를 덖어 추모제 성향의 헌다례를 진행한다.  


 “차에 관한 모든 부분이 장보고와 일치하는 면이 많다. 이것은 숨겨진 장보고의 역사다. ‘장보고 다례제’를 국제행사로 키워가는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장보고의 숨겨진 비밀, 죽청리에 관한 책을 엮은 정영래 전 완도문화원장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역사학계는 탐탁지 않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문학계에서는 이미 환영할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문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대목으로 학계의 평가가 이어진다.

 

녹차는 색을 중요시 한 일본의 차문화
완도수목원에는 야생차나무가 있다.

 

완도수목원 동백원에는 차나무가 있다. 종류별 동백나무를 식재한 곳에 심어진 차나무. 그곳에 ‘녹차’가 아닌 ‘차나무’라는 표찰이 붙어 있다. “차나무라고요?” 필자의 질문에 수목원 연구원의 자신 있는 대답이 이어졌다. 동백나무가 차나무과에 속한 이유를 들어 야생차나무를 구해 와서 지난 2014년에 동백원을 꾸밀 때 심었다고 한다.

그것이 영생불멸의 나무로 알려진 고차수일까? 동백나무와 같이 직근성으로 뿌리를 4미터 정도 내린다는 고차수. 수명이 무려 3천년 이상이고 지구상에 7, 8천년 된 야생차나무 고차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녹차라고 부르지 않는다. 녹차는 일본의 차문화가 색을 중요시 여기는 것에서 전래한다. 다산 정약용의 그늘에 가려진 조선의 실학자 풍석 서유구 역시 그의 저서 임원경제지인 정조지에 차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동다송과 다신전을 편찬해 우리 차문화를 새롭게 정리한 초의선사를 내가 알게 된 것은 한 편의 소설 때문. 장흥출신 소설가 한승원, 그는 ‘자산어보’라는 영화로 주목받았던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손암 정약전을 다룬 소설을 먼저 냈다. 그 세월이 무려 20년 전이다. 그 책의 제목이 ‘흑산도 하는 길’이었다. 그때 그의 소설이 흥행을 이룬 덕분에 연달아 초의, 다산, 추사의 이야기를 작품화 했다.

그는 채식주의자라는 소설로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맨부커상을 거머쥐며 우리의 문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소설가 한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한승원은 조선의 프로페셔널 인생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선보였다. 18세기 조선사회는 놀라운 변화가 일었다. 그 중심에 초의선사도 있었다. 이후, 완도출신 두 다승이 초의차 보존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들 업적을 우리는 허투루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청해진의 장보고가 추구했던 인류애의 한 부분과 같은, 드넓은 바다를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의 품성이다. 

 

정지승/다큐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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