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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백제권 점령지 노비들까지 장보고에 줘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7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6.04 13:06
  • 수정 2021.06.0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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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군사편제에서 국왕의 직접적인 필요에 의해 구성된 시위부의 소속된 군사의 하나로 卒이 만들어졌지만 정원은 117인이었으니 장보고에게 1만명의 졸(卒)을 주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상황인 것이다. 신라골품제에서도 졸은 신라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17등급에서 12등급의 신라골품들만이 할 수 있는 벼슬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과 같은 지배계층의 직이었다.

 

이런 사람 1만명을 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사실이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신라사관 학자들이 한 말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에게 1만의 군사를 주었다고 한다면 장보고는 흥덕왕(828) 때부터 대장군이었다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서주의 군중소장(軍中小將) 출신에 신라의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12등급에서 17등급의 골품들로 구성된 병사인 ‘卒’을 1만명이 주었다면 정말로 대단한 장보고이다는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위대한 장군 장보고에게 신라왕실이 엎드려 절했다는 소리이다. 신라사관학자들이 완도출신 장보고를 하찮은 변방장수로 하대하려다가, 만들어낸 웃지못할 역사의 에피소드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을 알고 있는 김부식은 왜 “卒”을 주었다고 기록했을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군사를 말할 때 대부분이 “군(軍)”이나 “병(兵)”으로 기록하고 있다. 卒을 사용하는 경우는 사졸(士卒)로 해서 일반 백성들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혹 이것도 김부식이 그렇게도 부러워하고 추앙해서 자기의 이름마저도 바꿔버리게 만든 소동파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동파가 살았던 시대에 장기(將棋)가 대유행을 하였다. 소동파에 관련된 특히나 중국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수용하고 경배하던 당시 고려의 실정을 생각한다면 중국의 놀이의 하나인 장기를 수용하여 최일선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막아내는 ‘졸’을 사용하여 일반 백성들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결론은 당시 완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숫자라고 볼 수 있다. 528년 골품제라는 신분제가 틀을 갖추면서 828년까지 300년 동안 신라를 지배한 신분제도요 지배논리로 정착한 것이었다. 특히나 남북국시대로 국제적 주변환경이 변화하면서 신라는 더욱 그 체제를 강고하게 해나갔으며 신라가 점령한 구백제권과 구고구려 유민들과 그 땅을 신라의 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고 나아가 제한하는 향, 소, 부곡이라는 거주환경까지 제한하는 신분적 제한제도로 골품제를 활용하여 사회의 유지했던 것이다. 완도는 그러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특히나 비교적 통제가 느슨한 섬이었다. 신라 골품제에서 자유스런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 바로 섬이라는 지역이었다. 특히나 구 백제권 서남해안 섬들은 신라의 지배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고 따라서 신라의 억압과 압력을 피해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몰려든 곳이 섬이었다.


6천년 전부터 완도 여서도의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완도사람들은 비교적 자유스러우면 풍족한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면서 완도에 모여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완도를 장보고는 택했던 것이다. 완도 출신이기에 완도를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신라 흥덕왕의 입장에서는 별볼일 없는 구백제권 점령지 노비들을 장보고에 준 것이로 볼 수 있다. 장보고에게 골품제 하에서 최하층민의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도록 준 것이다. 국가에 공을 세우면 식읍(食邑)을 내리듯이 1만명을 통솔할 권한을 준 것으로 봐야 옳을 것이다. 839년 장보고가 김우징을 신라왕으로 옹립하고 나서 신무왕으로부터 식읍을 받았다. 거기에는 호(戶)라고 분명하게 2천가구가 먹을 수 있는 토지를 하사했다. 식읍 2천호를 준다는 것은 거기에 사람까지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1호당 5명만 잡아도 1만명이다.

 

신라역사상 기록으로 볼 때 장보고가 가장 많은 식읍을 받았다. 1호당 5명만 잡아도 1만명이다. 김유신은 500호를 받았다.
청해진대사 궁복을 봉하여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천호를 봉하여 주었다.  흥덕왕이 1만명의 사람들을 주고 신무왕이 다시 식실 2천호를 주었다.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다시 회복시켜준 장보고이다. 그래서 문성왕은 장보고의 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며 칭송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있다. 그리고 장복을 내렸다. 진해장군에 걸맞는 의복을 말한다. 이제 그만한 예(禮)를 갖추어야 하는 신라의 주요 인사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清海鎮大使弓福, 甞以兵助神考, 滅先朝之巨賊. 其㓛烈可忘耶.” 乃拜爲鎮海將軍, 兼賜章服.


  청해진 대사 궁복은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 신무왕의 군사적인 부분을 많이 도와 선조의 큰 도적을 멸하였다. 그 공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이에 진해장군으로 삼고 아울러 장복(章服)을 내렸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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