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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좋아하는 것도 함께 데려왔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6.04 13:09
  • 수정 2021.06.0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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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을 달린다.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모퉁이가 나타난다. 건물이 촘촘하게 들어선 좁고, 넓은 길을 온몸으로 달리다 보면 숨이 차올라 더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기 위해 움켜쥔 주먹을 풀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웃는다.
그때 나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더듬거리듯 뻑뻑한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서서히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꿈을 조립하듯 다시 기억을 정리하면 현실에서 도망가는 내가 길 위에 있을 뿐이다.


현실의 풍경처럼 꿈속의 풍경들을 선명하게 바라본다. 꿈은 내 기억에 새겨진 채 늘 나를 아프게 한다. 달리고 싶은 게 꿈이 돼버린 나는 푸르스름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깡마르고 여린 체격이었지만, 감기도 앓지 않는 깡다구 있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엔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방에 틀어박혀 혼자서 책 읽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 기억을 뒤져봐도 운동장에서 뛰놀거나, 골목을 달리던 나는 없다. 대신 책을 읽다가 행간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넘나드는 겁 없는 아이가 있다. 글 읽는 걸 좋아하면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글은 서울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아이가 촌구석에서 도피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던 내가 요즘엔 글을 쓰며 도시라는 갑갑한 현실에서 도망친다.


어쩌면 장애인이라는 본질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인지도, 서른 살에 난치성 질환이 찾아오며 양쪽 고관절을 수술했다. 그때부터 나는 아무리 급해도 달리기를 못 한다. 숨이 차도록 달려보고 싶은 꿈은 하지 못해서 꾸게 된 몽니 같은 것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해서인지 가끔 잠을 자다 달리기를 하며 꿈을 깬다. 악몽처럼 말이다.
 몸이 병들자 마음마저 전염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감각이 예민해지고 입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들이 거칠어졌다.


하고 나면 내게도 듣는이에게도 상처가 되는 말, 차마 뱉지 못하고 가슴에 차곡차곡 쌓다 보니 벽이 되었고, 어느 순간 그 벽이 무너지면 나도 부서질 것 같아서 하지 못한 말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일기처럼, 푸념처럼, 넋두리처럼 그렇게 매일 썼다. 쪼그라들었던 내가 글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사람을 멀리했던 내가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글을 쓰면서부터다.


가면 뒤에 숨어 있던 나는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망상과 공상을 향유해도 손가락질받지 않고, 스스로 묶어놓았던 마음에 자유를 주는 시간은 마법과 같았다. 통증이 시작되면 바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노트북 앞에 앉아 심장을 비틀어 글을 쓰고 나면 어느덧 고통은 온몸을 한바탕 휩쓸고 멀어진다. 이젠 글로써 병을 다스릴 정도로 글 쓰는 시간을 즐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그로 인해 행동반경이 좁아진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
글로 인해 환자로, 또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나를 받아들이기도 편안해졌다. 병으로 인해 잃기도 했지만 얻은 것도 있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평탄하게 살았다면 그냥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으로만 나이가 들어가고 있을 테니.


 삶이라는 모호함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분법적 사고로 설명할 수 없기에 지금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순간들이 가져다준 여러 감정이 하나하나 더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그 느낌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후회하며 돌아볼 어떤 행복도, 후회하며 돌아볼 어떤 안타까움도 중요하지 않음을 알았다. 잃어버린 뒷부분에 개의치 않고, 앞으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에 의미를 두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가끔 달리는 악몽도 꾸면서 말이다.

 

김지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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