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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왕국 완도 후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6.18 08:38
  • 수정 2021.06.1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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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일을 시작해서 저녁까지, 겨우 저녁을 먹고 나면 바로 결속(結束)이라고 하여 낮에 말려 놓은 김을 판매할 수 있도록 다듬고 묶어서 놓은 후에야 겨우 잠을 잘 수가 있었다.다음날 쓸 김을 뜯어는 왔지만 혹 파래가 섞여 있으면 파래를 골라내어야 한다. 파래가 섞여 있으면 값이 더 떨어지기 때문에 전등불도 없는 호롱불 밑에서 그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자정에 가까워졌다.


잠은 겨우 대략 네다섯 시간 밖에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제 말려 놓은 김을 가족 중 누군가 새벽에 판매를 하러 읍내로 가야한다.
판매를 하고 온 사람은 바로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곧장 건조장으로 가서 보고를 한다. 김 값을 잘 받는 날이면 온 가족이 모두 깔깔 거리고 한바탕 웃고는 더 힘을 받아 일을 했었다.


그렇게 완도에 부를 안겨주었던 김(해태), 그 김의 왕국이라 불리던 완도가 이제 전복양식으로 변경하면서 인근의 해남과 장흥에 밀려 있지만, 그래도 실제 수산 소득은 어느 군보다 높다. 완도군민들은 완도 김이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이었던 것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옛날이긴 하지만......,김 양식을 시작할 시기가 되면 가난 때문에 김 양식 어민들의 삶은 더 어려웠다. 농촌에서 벼를 수확하기까지 식량이 모자라 정부 양곡을 가져다 먹고 가을에 벼를 수확하면 그때 갚는 때였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오직 김이 생산되어야 빚도 갚고 자식들하고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김 생산이 끝남과 동시에 빌린 대출금을 갚아야 했기에 돈이 다 없어지는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공판에 물 떨어지면 돈도 같이 떨어진다고 했다. 공판이란 김을 뜰 때 까라 놓고 사용하던 판을 말한다.그때 정부는 외화가 없어서 무척 어려운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이 수출이 되어 외화를 벌어 오는 것을 알고, 완도의 조합장들이 면담을 하려고 사전에 예약하지 않아도 완도에서 조합장이 왔다고만 하면 만나주었다고 한다.


조합장들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단 한 가지 김 생산을 위한 예산이었다. 대통령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 하면 상공부장관을 불러 조합장들이 원하는 대로 돈을 주라고 할 정도였다.
예산이 내려오면 그 돈은 소위 전도금(前渡金)이란 이름으로 어민들에게 대출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김 양식이 시작되고, 김을 수확을 하면 그 빚을 갚았다. 그러던 것이 이제 돈이 남아돈다고 한다. 어촌에 살고 있는 양식 어민들은 넉넉한 여유 돈이 두고 살아가고 있다. 1948년 6월 20일자 서울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해태 수출액이 10억원 돌파”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해의(海衣)에 대해 쓴 내용을 보면 남조선 수산계의 제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일본무역의 총애를 받아 여수항에 집하된 수출 해의 510만속 중 3백만 속은 두 차례에 걸쳐 수출되었고, 210만속은 잔고 되어, 수산협회에서는 중앙청에 수출허가를 교섭 중이든 바, 지난 3일부로 허가 되어 운수부 소속선 리차드W턱스호에 잔고 210만속을 적재하여 지난 9일 출항하였는데, 가격은 전반이 1속당 176원60전과 금번의 속당(束當) 250원으로 1947년도 해의(海衣)수출 총액은 10억5천4백8십만 원의 거액에 달한다는 기사를 보면 엄청난 량을 수출했었고 국가는 여기에서 외화획득을 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수출을 했으니 대통령께서도 적극적으로 도왔을 것이다.그래서 기사제목을 해태왕국 완도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전복양식으로 우리 완도에서 생산되는 량은 2020년 현재, 총 생산량이 14,411톤이고, 금액으로는 5천4십4억 원이나 된다.
그 외에도 또 다를 양식으로 얻어지는 생산액을 합한다면 영간 소득이 엄청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후편/끝)
 

 

마광남/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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