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신라 골품제에 정면으로 반하는‘청해진’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9

  • 신복남 기자 sbbn2000@hanmail.net
  • 입력 2021.06.18 08:44
  • 수정 2021.11.20 19:16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 2021년도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인류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에 장보고가 이러한 이념을 내걸며 말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後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鎮清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清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㠀.


후에 보고가 귀국하여 흥덕왕을 뵙고,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 지금[고려]은 그곳을 완도(莞島)라 부른다.


장보고가 청해를 설치한 분명한 목적을 말하고 있다. 노비해방, 즉 인간해방을 위한 목적으로 그는 청해진을 설진한다. 남북국시대로 전환되면서 676년 이후 구백제권 유민들과 구고구려권 사람들이 150여년 동안 신라에 흡수되지 못하고 떠돌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신라노(新羅奴)의 문제이다. 신라노들은 신라골품제 하에서 구백제와 구고구려권 점령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남북국시대로 전환된지 150년이 흘렀지만 신라로 흡수되지 못하고 또한 강력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로 인하여 이방인으로 소외된 채 생활하다 중국에까지 노예로 팔려가는 비참한 신세였던 것이다. 이들은 신라에서만이 아니라 중국으로 팔려가서 노비로 전락하여 거주제한과 의식주 생활의 제한을 받으면서 정말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한 당시의 사회환경을 개선하고자 장보고가 나선 것이다.

 

물론 명분이지만 그는 가장 먼저 국제적인 무역을 하여 돈을 벌겠다는 명분보다는 인간이 노비로 전락하여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노비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이를 개선하여 고치겠다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목적으로 청해에 자리를 잡았다.


남북국시대로 전환되어 구백제권과 구고구려권 사람들은 골품제에 의해 차별과 소외, 억압과 착취를 받고 각종 의식주생활의 제한에 따라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떠돌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강력한 신라 내부의 신분제인 골품제로 인하여 소위 통합된 뒤 150년이 지나도록 신라로 흡수되지 못하고 영원한 이방인 취급을 받고 신라골품제 하에서는 귀찮은 존재로 인식되어 사람을 사고파는 물건취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덕왕의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에는 존비가 있으니 명칭과 법칙도 같지 않으며 의복 역시 다르다)는 포고문이 신라골품제를 그대로 말하고 있다.


대를 이어 종신적인 신분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자국민이 자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비가 될 수밖에 없는 신분제도인 골품제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골품제의 압박에서 중국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최치원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도 중국으로 다른 나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힘든 세계 최악의 신분제도가 정착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을 편안케 해야 할 신라의 귀족들과 왕족들은 이러한 골품제를 자기들의 보호논리로 삼고 진영논리로 삼아 백성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을 물건취급하고 있었다. 662년 2월 삼국사기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의 기록이다.


  論功, 中分本彼宫財貨·田荘·奴僕, 以賜庾信·仁問.
  전공을 논하여, 본피궁(本彼宫)의 재화와 전장(田荘), 노복(奴僕)을 절반으로 나누어서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내려주었다.


김유신과 김인문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고 자국민인 본피궁의 노비들을 상으로 내려주는,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는 사회였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660년 6월 신라와의 전쟁을 위해 출전하는 계백장군의 기록에는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신라의 노비가 될까 염려된다면 신라의 간악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를 강력 비난하고 있다.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
신라 골품제 하에서 신라의 노비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귀족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한 강력한 진영논리로서의 골품제는 고려에 이어 성리학이 지배논리로 군림한 조선까지 이어진다. (계속)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