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삼성 반도체같은 도자기로 세계를 휩쓸다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11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7.03 10:23
  • 수정 2021.07.03 10:24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완도는 황장목이 무성한 지역이었다. 그야말로 아름드리 송진이 가득한 붉은 소나무가 청해진에는 과거부터 있었다. 완도 상왕산에는 호랑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엄청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조선왕조실록 성종대의 기록이나 일제강점기 ‘조선수산업지’에도 완도에서 황장목이 무성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황장목은 송진이 많이 함유하고 있어 목재가 물에 강하고 엄청 고화력을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활용하면 1,300도까지 올려야 하는 자기를 만들 수 있고 또한 충격에 강하고 바닷물에 부식이 잘 안되는 황장목으로 만든 배는 대양항해를 가능하게 하여 도자기를 생산하여 각국으로 수출하면 청해민에게 의식주뿐만 아니라 문화생활까지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자유를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보고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하고자 하는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의식주를 해결해주었다. 청해진 주변의 강진 마량과 고금, 칠량 등지에서 도자기를 만들 흙을 구하고, 황장목 등 고화력을 낼 수 있는 목재와 목탄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이를 선박을 이용하여 중국 당나라에 수출까지 하였다. 이러한 청해진의 주변 환경이 청해진의 독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떤 곳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원료를 구하고 생산하여 내다 팔 수 있는 경제적 기반과 토대를 확실하게 만들어낸 것이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도 힘든 중국 도자기에 지친 아랍인 등 서구의 상인들이 신라 청해진으로 몰려들었다.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청해진은 국제적인 무역항이 되었다. 일본과 당나라를 오가는 물자는 청해진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이를 말해준다.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된 청해민들은 그들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여 중국의 자기 기술을 능가했다. 완도가 가진 우수한 흙과 고화력의 불(火) 덕택이었다. 중국으로만 몰리던 서구유럽과 아랍상인들의 돈들이 신라로 쏟아졌다. 신라 경주는 황금의 도시가 되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외부의 돈에 유입에 신라는 최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흥덕왕의 포고문과 처용무의 이야기를 이를 말해준다.


장보고에게 있어서 도자기는 지금으로 말하면 삼성의 반도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공급이 부족하여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도자기 제조비법을 중국만이 아는 중국에서는 비밀로 아무도 그것을 전파하거나 유포하지 못하게 강력하게 막고 있는 것을 장보고는 습득하여 세계의 유통질서를 재편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단한 장보고의 선견지명이 완도를 청해진제국으로 급격하게 끌어올린 것이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강진과 해남, 그리고 자기 제조에 적합한 흙과 불을 구할 수 있는 부안 등 구백제권 지역은 거의가 장보고 청해진권역으로 변하였다. 청해진제국 당시 신라의 편제로는 고이부곡의 섬으로 취급되었던 것 같다. 고이부곡(古伊部曲) 즉 지금의 고흥을 말한다. 고양이를키우는 노비층들이 사는 집단마을이 곧 고이부곡이다. 이러한 지명 덕분에 현재 고양이로 부르게 된 것이다. 고이부곡 사람들이 키우는 호랑이 즉 고양이이다. 지금 현재도 금당도 및 금일도는 고흥과 가깝다. 금당도 유람선이 고흥에서 출항하고 있고 금당도로 가려면 완도보다는 지금도 고흥에서 타는 것이 가깝다.


고려청자는 지금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고려청자 24점 가운데 18점이 청해진과 바로 마주 보이는 강진에서 만들어졌다. 무려 우리나라 고려청자의 70%가 강진에서 만들어졌다. 대단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도자기를 생산하고 공급하였다. 무엇이 전라도 강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 반드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이를 필연이라고 한다. 강진이 도자기를 생산하게 된 근거와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어디일까? 바로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도자기를 생산하는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구 유럽도 마찬가지지만 기술을 습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일본은 1600년대에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조선의 도공(陶工)을 강제로 잡아가서야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그만큼 어려운 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보고 덕분에 중국의 당나라와 같은 시기에 생산하여 전세계에 수출하였던 것이다. 중국산의 공급이 부족하자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이 그 공급을 대신한 것이다. 엄청난 세계적 도자기 수요에 부응한 것이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