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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포석정의 모태‘전복’모양 본 떠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7.17 11:14
  • 수정 2021.07.1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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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과 마주 보이는 강진에 현재 180여군데 가마터가 발견되었는데 우리나라 전체의 60%에 달한다.
또한 대구면 일대에서 중국 절강성 명주의 월주요 도자기와 매우 유사한 해무리굽 도자기 파편들이 수없이 발견되어 장보고 시대부터 강진의 자기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청자의 기원은 당연히 장보고 청해진제국시대부터 출발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도자기를 수송할 선박도 완도에 풍부한 황장목 덕택에 크고 강하게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배를 건조했다.


신라의 골품제의 압박에 서러움을 당하여 섬으로 피신해 거주하던 사람들이 선박을 건조할 기술을 가지고 계승하고 있었기에 장보고의 재정적 지원은 그들의 배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 수 있게 만들었다. 배를 만드는 사람들(배무이)이 엄청 몰려 들었다. 장보고 청해진제국 경제적 번영이 더욱 그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수많은 선박들이 건조되었다. 그 배들이 대양을 향해 출항했다.
바다에 고속도로를 장보고는 건설했다. 중국과 일본을 오갈 수 있는 항로를 배만 가지고 건설해낸 것이다. 바다를 생명의 줄로 여기고 살아온 완도사람들의 문화와 접목되어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6천년 전 여서도의 패총에서 알 수 있듯이 배를 건조하여 항해한 기술과 문화가 그대로 쌓여 청해진제국 장보고의 선박으로 구현된 것이다. 바다의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는 배가 있었기에 장보고는 청해진에 자유민들의 자유스런 경제활동을 가능케 하였고 사람들은 풍족함을 구가했다.
노비라는 골품제의 제약도 청해진에서는 없었다. 모두가 풍족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신라 경주로 엄청난 재화가 몰려 들어갔다. 특히나 장보고는 신무왕시절 재상(宰相)까지 역임했었다. 신라를 먹여 살릴 중책을 맡은 것이다. 청해진을 뛰어넘어 경주까지 그의 능력은 발휘되었다.


청해진에는 지금도 장보고의 흔적이 차고 넘친다. 1,20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의 흔적이 보인다. 완도만이 아니라 지금 전라도 거의 전체가 장보고 권역이었다. 노비가 아닌 자유민으로서, 신라골품제라는 세계 최악의 신분제도에서 해방된 곳이 완도였다.


장보고 청해진제국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어떠한 의식주생활을 하면서 생활을 영위했을까? 중요한 문제이다. 곧 청해진 사람들의 삶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의식주를 통해 삶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대한민국 국가사적 제1호인 경주의 포석정(鮑石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경주에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전복 모양의 정자가 중요한 국가의식을 치루는 장소였고 이를 전복모양을 본 따 만들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복(全鰒)을 귀하게 대했다는 소리이다.
왕이 행차는 정자에 놔둘 정도이면 12지신상에 버금가는 물건으로 취급되었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동물도 아닌 수산물이 그러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십이지신앙은 신라와 연관이 깊다. 신라가 거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해산물인 전복이 왕이 행차하여 의례하는 곳의 상징이라는 놀랄 수밖에 없다.


포석정에서 신라왕들과 왕실, 귀족들은 자주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포석정이 처음 역사에 출현한 것도 신라 헌강왕 875년의 기록이다. 신라의 경제적 환경이 좋아지자 각종 의식주 생활이 풍족해졌다. 다 청해진 덕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유득 그만큼 전복은 신라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음을 말하고 있다.
청해진에서는 이미 6천년 전의 여서도 패총에서 전복껍데기가 발견되었다.


완도 사람들도 전복을 잡아 먹었다는 소리이다. 신라왕족과 귀족들이 귀하게 여긴 전복을 청해진 사람들은 즐겨먹었을 것이다. 아무런 신분적 제약도 없이 누구나가 맑고 푸른 바다가 제공해주는 신선한 해산물을 먹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바닷가의 당시 사람들의 공통된 의식주였을 것이다. 고려도경에서도 역시 그러한 점을 말하고 있다. 청해진 사람들 역시 그러한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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