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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 충무사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06.11.15 18:28
  • 수정 2015.11.07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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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 충무사

소재지 : 전남남도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이곳은 임진왜란때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임시로 안장하였던 터이다

이순진 장군은 이 고금도에서 수군본영을 설치하여 수군을 훈련하고 전선을 건조 수리하는 등 군비를 재정비하여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다.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본영이었던 이곳에 80여일간 안장한 후 이듬해에 충남아산(현충사근처)으로 옮겼다.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는 20리 안팎이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선조 31)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도(현 목포시 충무동)로 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으로 진린장군이 5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 침략을 막아냈던 유적이다.

특히 이곳은 해수로의 요새지로서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고흥등에 출몰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 공은 이 때 우선 본영을 건설한다든지 피난민들을 거두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안의 민가만도 수만호에 달해 한산도 시절의 10배나 되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해 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순천 수교(왜교)에 출몰한 왜적을 소탕하고, 다시 10월 9일에는 고금도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가 11월 9일에는 연합함대가 노량을 향하여 출진하여 충무공이 11월 19일(양력으로는 12월 16일) 아침, 54세를 일기로 순국하여 이곳으로 사체를 봉안하였다가 그 이듬해 1599년(선조 32년) 2월 11일 정식으로 발인, 고향인 충남 아산의 묘역으로 옮겼다. 이사당의 유래를 보면 이 자리에 본시 명군의 도독 진린이 이곳에 거할 때 사당을 짓고 관왕(관우)을 배향했었는데 그 후 현종 때 절도사 유비연이 중수하고 중 천휘로 하여금 그 곁에 암자(옥천암)를 짓고 이에 제사케하는 한편 딴 채 하나를 지어 진린을 재향하다 1683년(숙종9년)에 이순신 장군까지 서무에 축배하였다. 그 뒤 1791년(정조 15년)에 왕께서 탄보묘란 사액을 내리고 1792년(정조16년) 왕명으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명의 부총관 등자룡을 아울러 배양케 하고 곧이어 1801년(순조1년)에는 수호암자의 이름도 옥천사라 고쳤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어 제사도 끊기고 말기에는 관우의 상까지도 바닷물에 던져 졌으나 불상만은 건져 다른 사찰로 옮겨졌다. 해방 후 관왕묘 옛자리에 충무사를 새로 짓고 충무공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내에는 공의 경당과 숙종 39년(1713)에 세운 관왕묘비가 있으며, 이 비문에는 명나라 수장이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여기서 경혈하고 귀국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주요 건물로는 사당과 부속건물이 있다.

매년 4월 28일 공의 생신일에 공의 전공을 기념하는 탄신기념제를 올리고 있다.

고금도 충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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