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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을 가장 좋아했던 진시황과 조조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16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8.1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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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에 나온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포작인이 없으면 전선이 운행할 수가 없다고 나온다.
장보고 청해진제국의 해상무역을 전담하는 사람들의 후손들이자 이순신 장군을 도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수군의 격군들이 다 이 포작인들로 이루어진 선단이었다는 것이다. 전복을 만드는 사람들이 만든 역사였다. 선조실록 121권, 선조 33년 1월 4일에 전라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장계(狀啓)이다.


전선(戰船)은 포작한(鮑作干)이 없으면 운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가를 지급하지 않으면 전장(戰場)에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처자를 무휼(撫恤)할 만한 가물(價物)을 넉넉히 지급할 일을 행이(行移)하여 알렸습니다. 각처의 포작한들이 격군(格軍)으로 동원된다는 영을 듣고는 온갖 계책을 다하여 이를 피하려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처자를 배에다 싣고 먼 해도로 들어가는 자가 열이면 8∼9명이나 됩니다. 이것이 계속된다면 주사(舟師)의 일이 마침내 형편없게 될 것이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포작인들이 정말로 우리 역사에서 고생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전복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전복을 만드는 사람들의 역사가 청해진 곳곳에 숨어있는 것이다.


특히나 고금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차리고 중국 명나라 진린 도독과 함께 조명연합수군 대본영을 차린 완도출신의 포작인들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구했고 나아가 항일 해상의병 투쟁의 최일선에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신라 포석정을 지을 당시 이들 전복을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이렇게 꾸려나갈 줄 미리 알았지 않았을까?


조고(趙高)는 중국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제를 따라 여행하던 중 시황제가 49세에 병사하자, 전복을 이용하여 진시황제의 죽음을 감추고, 당시의 승상 이사와 짜고 거짓 조서를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와 명장 몽염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조고는 진시황제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조고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까 두려워 진시황제의 시체에 평소 즐겨먹던 전복을 가득 넣어 썩는 냄새로 인하여 진시황제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수도로 돌아와 진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를 황제자리에 앉혀놓고 자기마음대로 조종하여 진시황제의 황족들을 3년 동안에 모조리 몰살했다.

 

그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전복’이 만든 것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155-220)는 평소에 전복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귀한 전복을 뱉으면서 인재를 맞이했다고 하면서 조조는 “단가행(短歌行)”이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
산은 높아지는 것을 싫다 않고, 바다(물)는 깊어지기를 마다 않는다. 주공이 입안의 음식을 뱉으며 (인재를) 맞이하자 천하의 민심이 돌아섰다.


조조가 죽은 후 셋째 아들인 조식이 부친을 추모한 “구제선주표(求祭先主表)”에서 부친 조조가 전복을 무척 좋아해서 자신이 서주자사로 근무할 때 전복을 200개나 구해서 바쳤다(先王喜食鳆鱼, 臣前已表得徐州臧霸送鳆鱼二百枚) 한다. 여기서 전복을 세는 수량단위를 매(枚)라 했음을 알 수 있다. 전복의 껍데기가 넓적하여 종이나 널빤지를 세는 단위인 매를 사용한 것 같다.

 

다른 어패류를 세는 단위와는 확실하게 다른 해산물이다. 그만큼 특이하게 취급받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삼국지에서 그 유명한 조조도 입안의 고급음식으로 전복을 거론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전복을 셀 때 ‘마리’로 세고 있으나 앞으로 ‘매’도 생각해볼만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단위계량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복을 세는 단위는 100개를 기준으로 마른 전복에 대해서는 속(束), 첩(貼), 접을 사용했다. 그러나 생전복은 말(斗)을 사용했다. 그래서 패류이지만 어류처럼 한 마리, 두 마리로 세고 있는 것이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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