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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 고인돌이 발견된 고금도, 얼마나 큰 세력이었나

정지승의 완도, 어디까지 가봤니?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9.10 15:51
  • 수정 2021.11.2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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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섬이었을까? 소빙하기를 거쳤던 지구, 한반도가 왜와 제주도까지 뭍으로 연결된 그때는 육지였을까? 고금대교를 건너고 도로변에 보이는 고인돌 군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농경사회 시작을 알리는 선사시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겨나 국가가 형성되었다는데, 고금도에도 부족국가가 있었을까?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해양세력의 탄생,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 부족사회가 과연 고금도에도 존재했을까?

한반도 고인돌에는 천문(天文) 흔적이 가득하다. 밤하늘 별자리를 관찰하고 하늘의 기운을 읽었던 고대의 흔적들, 태초 인류가 삼라만상 우주원리를 이해하는 과정이 고인돌에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목넘재골 아래에 있는 고인돌에도 별자리를 표현한 성혈(性穴)이 뚜렷하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울 따름이다. 아주 옛날, 그 옛날에 고금도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 

 

최초의 국가 고조선, 고금도는 마한의 영역

 

누구나 한번은 궁금증을 품어야 맞다. 고인돌 이야기다. 사람들은 마냥 흔하디흔한 바윗덩어리로 치부하기 일쑤다. 너무 흔한 탓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네 역사의식이 바닥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고인돌이 청동기시대 무덤이면 그만이라고 한다. 그 말대로 고인돌이 지닌 의미는 단지 그것뿐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를 거꾸로 보는 것. 이런 방식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대부분이 고인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고,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왜 그러는 줄  느끼지 못한다. 역사 시간에 그렇게 배웠으니 은연중에 그것이 맞을 것이라 여기며 살고있다. 그 이면에 숨겨진 내막을 전혀 모른 채 고대 신화로만 만족하고 있는 것. 이것은 일제가 의도했던 우리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는 정책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그 잔혹함을 겪은 우리민족은 여전히 일본의 계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 역사학계를 아직도 그들이 움직이고 있다. 식민사관에 물든 강단사학자들에 의해 한반도의 빛난 역사는 오랫동안 우리 스스로에게서 강등되어 왔던 것.

고인돌은 고대인의 무덤만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에 인류가 시작한 시점을 우리에게 말한다. 한반도 역사의 서막을 알리는 존재를 우리는 단순히 생각한다. 청동기시대, 그 시대가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은 무엇일까? 그 시대는 바로 한반도에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라는 것. 

우리 민족을 여기까지 서 있게 한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조선이다. 이성계가 세웠던 500년 역사를 자랑한 왕조시대가 아닌 수천 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의 옛 조선, 그 나라를 우리는 고조선이라 부른다. 그리고 고금도는 마한의 영역에 속한 부족국가였다.

 


선사시대 한반도 문명의 중심 고인돌 문화 

 

한반도 문명 고인돌, 그것은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가장 과학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석재 가공 능력, 중장비도 없고 다양한 도구도 없던 고대에 거대한 바윗돌을 다듬고 축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술과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고인돌 문화,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 우리에게는 아주 소중한 자산이다.

한반도를 지배하며 세계 거석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고인돌은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도 있지만, 단순히 무덤만으로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자료가 있다. 양과 규모에서 세계 최대라 자부하는 고인돌이 지난 2000년 유네스코 등재 이후, 다시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숲속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전남 화순의 고인돌 유적지와 50~100t의 덮개돌이 있는 고창 고인돌 군락은 원형이 자연 속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밀집도와 규모가 세계 최고라 인정되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것. 고인돌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많다. 고금도의 고인돌도 마찬가지다.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구체적 내용이 없다. 

고인돌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중국의 후한서에 덮개돌의 커다란 모양을 기록한 것과 고려시대 시인이자 사상가였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이규보는 “지석이란 것을 구경했는데, 과연 신기한 기술로서 이상하다”라고 그의 저서에 기록하고 있다. ‘돌이 고였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고인돌은 큰 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세계의 공통 유산이다.

지금,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가 진행형이다.

국가적으로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는 진행형이다. 문재인 정부가 가야문명의 역사를 복원하고자 한 것도 한 맥락이다. 지난달 대한민국이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온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의 역사복원에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식민사관론자들의 역사왜곡이 심하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홍범도 장군의 음모론도 제기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어록을 사람들은 즐겨 사용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라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를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이며 독립투사였다. 그는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고조선의 역사를 연구했던 분이다. 

 

그의 고대사 연구는 한반도가 고대국가로 형성된 이후, 고구려와 발해로 발전한 한민족의 역사, 그것은 저 광활한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을 찾고자 했던 독립군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것이 살아 있는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 민족의 기상이다.  적어도 독립운동을 펼쳤던 독립군들에 의해 우리의 민족정신이 발현한 계기가 되었던 것.

 

그러나 현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땅에 존재하는 고유 자원이나 우리가 깊이 있게 알아야 할 지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 뿌리를 찾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해야하는 이유이다.

 

신령한 땅 고금도. 그리고 섬 곳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지역에 규모가 큰 공동사회가 고대부터 형성되었다는 뜻. 역사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 어쩌면 청해진 장보고의 세력을 키워 낸 막강한 해양세력이 그때 고금도에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고금도 목넘재골 아래 고인돌공원에는 기원전 선사시대로 가는 비밀의 문이 열리고 있다.  

 

정지승/다큐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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