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가을이 주는 가르침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11.12 10:37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을 산에  첫 눈이 내렸다.
산행의 초입 까지는 자세히 치켜 올려 봐야  떨어지는게 보일 정도 였는데 정상에 오르니  그냥  멋 있다는 감정 몰입이 된다.  
함박 눈 같은 얕은 크기  폭포수처럼 일직선으로 뿌려주는 무한한 베품의 능력울  뽐 낸다.  


오가는 산행객들도 성별이나 나이 불문 하고  멋스런 주인공이 된다. 차가운 기온 때문일까. 호흡되는 공기가  훨씬 자연스럽고  쾌청하게 느껴진다.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거칠은 산 길에 부드러운 양탄자로 변신한만추의 낙엽들은 끝까지 소임을 다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 자연은 최소한 가르침으로  인간사를 되돌아 보고  성찰 하라는  묵언의  교훈을 준다.


침묵으로 답을 하고  익숙한 길을 걸어 간다.  그것이 오늘 내가 할수있는 유일한 응답이고  자연에 대한 예의   또한,  의무가 아닐까.
바뀌는 계절중  그 중에도 가을은  남자의 계절로  정의 되고 있다. 왜 하필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는지   어느 위인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굳이 남자라는 프레임으로 공식화 한것에 대한  의문 정도가 남는데  아마, 봄과 여름의 돋아나는 소생과  불태워 영글어 가는 자연의 산고가  결실이라는 열매로 얻어지고  또 다시 토양으로 돌아가는  가을의 숙명같은 현상들을 가부장적인 우리 기준으로 볼때  남성상에 비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기준이라면 여성의 역할과 능력  그리고, 희생력은 남자와 하등 다를바가 없으니 이제는 특정 성별의 계절이 아니라  모두의 계절이라 칭해야 하지 않을까.   
자연은 구분 정의 되서는 안된다.  
자연은 독점되는 소유물이 아니다. 


공정한 선물이고 공유되야 하는  인간사 공동체적 자산 영역에 해당 되기 때문이다. 
가을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한 여름 열기에 스스로 승복하면서  이것 저것 벗어 던졌던게 인간들의 모습이였다.
불과 손꼽을 정도의  얼마 전 일이다.  


이제 아침 저녁은 물론이고  한 낮에도 한겹 두겹  껴입느라 혼란스럽다. 얼마 남지 않는 날이 지나면  내의를 입고  목도리를 하고  장갑을 끼고  두꺼운 방한복을 입게 된다.
이미 정해진 수순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간의 한계다. 스스로 벗고 스스로 입는게  인간이 할수 있는 능력의 전부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인간답게 산다는것으로 귀결되는 증빙이 아닐까. 계절은, 가을은 따로 있는게 아니다. 봄이 그렇고 여름도 그랬고  가을도 겨울도 그러할것이다.
하물며 생명 또한 그러하지 않겠나.   
삶과 죽음 또한 구분의 다름이 아니다.  


같은 공간에서  늘 존재하는 대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고 인간이 받아 들여야 하는 자세이고 의무여야 한다.
춥다가 아니고 추운대로  덥다가 아니라 더운대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인간으로서의 범위에서 사고 하고 행하면 된다.


삶이 고단하고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운것은 채워지지 않을 공간을 넘어서는 우매한 인간의 탐욕이 원인이다.주어진것에 감사 하지 못하고 만족 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는다면  그 어떤것이 주어진다고 해도 삶은 늘 그럴것이다. 낙엽이 흙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한 겨울 동장군이  또 다른 삶의 변화를 요구할것이다.


가을을 감사하고 겨울을 감사하게 맞게 지금을 보고  지금을 느끼고 지금 감사해 하자. 가족에게 지인과 친구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수많은 이웃들과 공유 하며 사는 삶의 지혜가 필요할때이다. 오늘 내린  첫 눈을 보고 느끼면 된다. 아름답운 자연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마음을 갖으라는 자연의 소리다. 귀를 쫑긋 세워 자연의 소리를 들어본다.

 

 

최정주 향우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