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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검사소 직원은 “검사님”이었다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시즌 2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12.1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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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어업조합연합회에서 수집한 김은 검사소에서 검사를 마치고 등급을 정하여 주었다. 그 등급이 김 단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고 전 완도문화원장을 역임한 정영래씨는 회상한다. 


당시 등급은 특송(特松), 송(松), 죽(竹), 매(梅), 동(桐), 추(秋), 풍(楓), 등(藤)으로 8등급이 있었다. 완도에서 주로 생산된 등급은 추, 풍, 등 급으로 특송은 한 속도 없었고 송도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단지 1965년도 금당도에서 죽이 12속 수집되었던 기억이 있다.


완도어업조합연합회 조합원들이 생산한 각 지역에서 검사를 마쳐야 한다. 각 지역의 검사장에는 그날 해당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다. 서로 등급을 잘 받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먼저 자기가 생산한 김 중에 제일  품질 좋은 몇 속을 검사원에게 바치는 것이 통례였다. 잘 봐주라는 소리였다.


검사원에게 조합원들이 부르는 명칭은 “검사님”이다. 외부인들이 이것을 보고 “완도에는 무슨 검님이 이리 많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검찰청 검사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완도 해태검사소 직원의 명칭은 바로 “검사님”이었다.


이렇게 수집된 완도산 김은 연합회 창고로 입고되어 장기보관을 목적으로 화입(火入) 절차를 거치는데 이것을 “화입해태”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얼구운 김”이라고 한다. 일차로 습기를 제거하는 공정이다. 습기가 제거되면 다시 습기가 차는 것을 막기 위해 철판상자(찐뿌렛트깡)를 만들어 포장했다. 철판상자의 입구는 지금 같은 테이프가 없어 창호지에 풀을 발라 입구를 봉하고 검사 봉인을 했다.

철판상자에 포장된 김은 나무상자로 포장을 했고, 포장된 나무상자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철이라고 하는 가는 철판을 못으로 고정했다. 이것은 수출을 대비한 모든 공정이다. 이 공정의 감독기관이 검사소다. 완도에는 창고업과 화입공장이 크게 번성하였고 인부를 부리고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체가 우리나라에 몇 개가 없을 때 완도에는 화입공장만 10여개소가 넘었다.


물동량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된 것이 노동조합이다. 완도 항운노조역사는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 완도노조의 운송수단은 구루마(손수레)와 지게였다. 당시 항운노조의 가장 큰 행사는 김을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배에다 옮겨 싣는 날이었다. 그날은 항운노조 온 가족이 축제분위기였다. 집집마다 걸게 장만한 음식을 점심시간에는 서로 모여 나누어 먹는 특별한 날, 김으로 인하여 완도는 개도 500환짜리를 물고 다니는 곳이 되었다.

 

김 수출 2016년 3억 달러 담배 8억 8,600만 달러 
참치 4억 8,900만 달러에 이어 3위 

김 건조장을 완도에서는 건장이라 한다. 건조장에는 김을 뜨는 곳을 뜰건장이라 하고 건장에는 발장과 꽃대가 있다. 건장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1950년대 김 생산이 한창일 때 완도군 인구는 16만에 육박했다. 16만 인구의 90% 이상이 김 생산에 직접 종사한 사람들이다. 당시 김 생산의 모든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일손 하나가 아쉬운 판국에 놀고 먹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1학년만 되어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건장에 발장이라도 주어야 하고 꽂대라도 모아야 했다. 이렇게 온 가족이 하루 종일 제조한 김이 대가족일 경우 5-60속을 제조하면서도 당시에는 큰돈이 되어 농사짓는 농부들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김은 어업조합에서 해태검사 절차를 거친 후 연합회 창고로 입고된다. 수작업으로 생산하던 김은 1980년대 김 건조기가 도입되면서 급속도로 수작업 생산이 감소하게 된다. 한 가정에서 하루 겨우 5-60속을 생산하던 것을 김 건조기 하나에서 하루 800-1,500속이 생산됨에 따라 수작업으로 생산하던 김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 김 수출이 2016년 단일 품목으로 3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우리나라 농수산식품 전체 수출 중 담배 8억 8,600만 달러, 참치 4억 8,900만 달러에 이어 3위 품목이자 가공과 원양 제품을 제외한 국내 생산물 중 가장 많은 수출을 기록해 수출 효자 품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도 완도는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완도사람들은 여전히 김을 ‘해우’나 ‘짐’이라고 부른다. 완도사람들이 부르는 ‘해우’는 김을 말하는 해의에서 나온 방언인 것 같고, ‘짐’은 김의 방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짐이라고 하는 명칭은 완도만이 가진 특산품이자 왕에게 진상하는 진상품, 중국의 황제에게 보내는 조공품으로서, 왕이 먹는 음식이라는 의미에서 짐(朕)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김이 역사상 처음 등장한 것은 해의(海衣)라는 이름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전라도의 토산물로 등장한다.


김은 완도를 빛나게 해준 해조류이다. 김이 없었다면 오늘날 완도의 명성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김은 완도를 대표하는 해조류이고 나아가 지금은 세계적인 식품이 된 그야말로 한류식품의 대표주자로 군림하고 있다. 한반도를 떠나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세계인의 식품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이 해조류 식품화는 완도바다에서 시작됐다.


짐이라고 부르는 김이라는 해조류를 먹는 아주 오래 됐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은 세종실록 1429년 7월 19일 기록이다. 중국에 조공(朝貢)으로 바칠 물목에 미역과 다시마와 더불어 해의(김)과 감태, 황각 등 해조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 황제에게 바칠 진헌품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물품으로 한반도에서 나는 해조류가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귀했고 중국 명나라에서 조선에 요구할만큼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세조실록 1459년 4월 12일 기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에게 선물로 김을 주었다는 것을 보면 김(海衣)은 당시 사회에서 귀한 물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은 진상품 및 조공품, 선물용으로 쓰인 아주 귀한 물목으로 관청에 의해 관리했다. 


귀한 물품인만큼 김에 관련된 부정적 면도 있었는데....<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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