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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天子)의 말이 내려와 끌고 가는 가교마을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스토리가 있는 우리마을 가교리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3.2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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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禮節)의 고장 고금면의 가교 마을, 이곳 마을은 주변 산의 준령이 아홉 마리 말이 꼬리를 물고 내려가는 형상과 같아 가마구미(駕馬九尾)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마을 전체 모양이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임금 수레와 같다 해서 가교(駕轎)라고 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완도군이 설군되면서 가마구미(駕馬九尾) 또는 가마동(駕馬洞)이라 하였으며, 동편 마을을 가교리, 서편 마을을 교동리(轎洞里)라고 불리던 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두 마을을 합하여 가(駕)와 교(轎)를 따서 가교리(駕轎里)라 칭하였다. 이후에도 가교리를 동리(東里), 교성리를 서리(西里)라고 부르다가 1955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서리(西里) 교동(轎洞)을 교성리(轎城里)로 개칭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교리에서 주목해야할 단어, 가(駕)는 일반적으로 '멍에 가'로 많이 쓰이는데, 또 다른 훈(訓)으로는 '타다' '오르다'가 있고 '천자(天子)의 수레'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김해김씨를 일컫는 가락김씨(駕洛金氏)에 쓰이는 가(駕) 또한 김수로왕이 '천자의 수레가 낙동강으로 왔다'는 설로 천자로 상징되는 김수로왕이 구지봉에 내려와 9족장들의 왕이 되면서 백제와 신라의 중간 쯤에 위치한 낙동강 유역 부근에 세웠던 가야국을 뜻하고 있다.


그런 점을 들어 가교리는 천자의 수레를 뜻하는 대명당의 지명 유래로 큰 인물이 많이 나오는 풍수적 지명에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더불어 가마교(轎)가 쓰인 것을 보면, 고대사회 때부터 큰 사람, 가마를 타고 나닐 수 있을만큼 큰 세력을 형성한 군장이나 천신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역사성과 풍수적 길지임을 엿볼 수 있다.   

 

가교리는 본동, 염전, 중촌, 음마동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한때는 고금면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았지만 현재 170세대, 300명이 거주하여 면내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염전은 지명에서 보듯이 바닷물을 끌어와 불로 끓여 소금을 만들던 화염전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본영을 설치했던 충무리에 전해졌다고 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화염전은 천일염전으로 변모되었다가 지금은 소금은 생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음마동은 본동과 약 2km 떨어진 외딴 곳에 약 300여 년 전 강중환이라는 사람이 진주에서 이곳으로 최초 입향하여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이후에 김해 김씨, 경주 정씨 등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약 30여 가구 집단 촌락이 음마동에 형성된 계기는 본동에 거주하던 정좌호 씨가 죽은 후에 부인이었던 박복수 여사가 1964년에 마을 앞 바다를 메워 면적 20ha의 간척지를 만들어 농경지가 많아지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으며, 지금은 한 사람이 대규모의 농사를 짓고 있다.


가장 입지 조건이 좋은 음마동에는 20여 년 전부터 광어, 전복 치패 등 양식장이 들어서면서 다른 마을에서 10가구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양식장을 하며 살고 있다.
 현재 가교 마을에는 나이 많은 어르신도 많지만 최근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어패류 양식업이 발달하여 젊은 사람들의 귀어가 늘어나 다양한 연령이 함께 살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08세의 오씨 할머니 한 분이 생존해 계셨지만 지난 1월에 돌아가시고 현재 최고령자는 95세의 김공례 할머니이며, 가장 어린 사람은 지난해 태어난 김정우 군이다.

 

고금면의 관문, 교통 중심지
 
면내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육지 끝인 강진군 마량면과 마을 큰 선창을 잇는 항로가 있어 오래 전부터 노를 저어 다녔으며, 그 후 동력을 장착한 목선 길영호 등이 운항되었고, 기술이 발달하고 왕래하는 이용객과 물류가 늘어나면서 뒷가마 선창으로 옮겨 가마호, 영진호, 농협호, 풍진호 등의 차도선이 운항하였다.

 

마을에서 마량까지는 약 1km로 거리가 가깝고 차도선으로 5분이면 왕래가 가능할 정도로 편리했지만 섬 사람들의 가장 큰 숙원인 다리가 놓아져 육지로의 이동이 편리해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을 용두리와 강진 마량을 연결하는 연륙교가 2007년 개통되면서 섬이었던 고금면이 이제는 육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설, 추석 명절을 맞아 향우들이 10시간을 넘게 버스를 타고 내려 왔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배가 묶여 마량에서 고향만 바라보다가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고, 밤에 급한 환자가 발생해도 배편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지만 연륙교 건설로 일거에 해결되었다.
이처럼 가교마을은 오랫동안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시작점, 해상 교통의 중심지, 면의 변화를 촉진하는 현장이었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드디어 섬에도 전기 불을 밝히다!

 

 

고흥군 출신 세계적인 프로레슬링 김일 선수가 일본에서 국위를 크게 선양하자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소원을 묻자 “고향 금산에 전기를 넣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후 청와대에서 현지에 파견한 조사관이 “고흥 금산과 여러 가지로 실정이 비슷한 완도에도 전기를 공급할 필요가 있다”라고 보고하여 고금면에도 전기 인입 공사가 시작되었다.


1969년 강진군 마량면과 고금면 가교리의 철탑 공사를 시작으로 전기 인입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가장 어려운 공사가 당시 기술로는 약 1km의 거리의 해상을 통과하여 고압선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때 가교, 교성리를 비롯한 주변 마을에서 소규모 목선을 총 동원하여 하나로 묶은 다음 그 위를 통해 고압선 연결해 1975년 3월 10일 역사적인 점화식을 가졌다.


(계속)

 

김선호 이장
정인호 담당관(가교마을 출신 공무원)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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