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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의 꼬리 부근에 자리한 음마봉(飮馬峰)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스토리가 있는 우리마을 가교리 2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3.3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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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의 지맥은 해남 두륜산의 주봉우리가 남동쪽으로 뻗어 내려가다가 봉황산을 일으켰다. 봉황산의 줄기는 북쪽으로 향하여 뻗어 백운산을 일으켰고, 여기서 3줄기로 갈라져 하나는 덕암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계당산을 만들고 세동치를 거쳐 덕동의 망덕산에 이르렀다. 또 한줄기는 덕암산에서 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내려가 삼발치를 지나 상정리의 음봉을 세우고 매실에 이르렀다.

 

마지막 줄기는 지남산에서 북쪽 아래 중간부근에 산성산(교성리 뒷산)을 거쳐 동쪽으로 십여리를 가다가 음마봉을 맺어 놓았다. 고금면의 지맥은 전체적으로 보면 대통령의 휘장으로 쓰이는 봉황의 모습이다.


음마봉은 봉황의 꼬리쪽에 위치한 산인데, 풍수가들은 "음마봉만을 놓고 보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려고 냇물에 급히 뛰어드는 형상인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명당터로 이런 풍수 지형에선 말의 생동감과 민첩한 기운을 받아 인재가 태어날 기운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자손들이 부귀하게 되는 좋은 집터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풍수형국이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며 "음마봉 아래에 조성된 저수지는 필요에 의해 조성됐겠지만 말에게 물을 주는 비보적 풍수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어 물이 마르지 않게 잘 관리하면 길지로써 마을 평안이 이어질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명당처 답게 이곳 음마봉에는 돌파리 지관이 숨진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약 200년 전 돌파리 지관이 고금도에 들어와 명당을 찾는다고 이곳저곳을 다니던 중 동네에 초상이 나자 한 상주가 그 돌파리 지관을 초대했다.
상주와 함께 가장 좋은 명당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상주가 풍수지리학에 상당한 식견이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신분이 거짓임이 탈로날 것을 염려하여 도망가기로 결심하고 급히 산을 내려오다가 기절하였는데 갈갈 소리만 내고 죽어 버렸다고. 나중에 이 말을 들은 상주는 그 자리가 갈(馬) 음(水) 형국이라 하는 줄 알고 거기에 묻었는데 이때부터 이 산을 음마봉(飮馬峰)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매월 초하루 임금을 그리워하며 충절을 세운 망재 

고금면은 유배지로도 잘 알려진 고장으로 유배의 아픔이 서려 있는 망재가 있다.
정득명(鄭得命)은 1627년 문과에 합격하여 행이조정랑(行吏曺正郞)을 역임하다가 강빈기옥사(姜嬪起獄死)로 피화(被禍)장으로 유배되었다가 인조 8년 1631년에 고금도 가마구미(駕馬九尾)로 유배지가 변경되었다.


정득명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육지와 가장 가까우면서 북쪽을 멀리 바라 볼 수 있는 마을 망재에 일성제(日省齊)를 세우고 음거하면서 매월 초하루에 임금을 향한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망재는 육지인 강진, 영암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뛰어나고 산 정상부에 넓은 평지가 펼쳐져 마을 어린이와 청년들의 공동놀이터나 초등학교 소풍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바다의 보물 창고 감태나루 

연륙교가 연결된 용두리와 진섬 사이에 감태나루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날 동네 주민들이 모여 풍어와 주민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감태나루 앞 바다 속에는 입자가 고운 갯벌이 넓게 분포하여 감태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어 맛과 질이 좋은 감태가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다. 최근까지 70대 이상의 어머니들이 감태 채취로 매년 1천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감태는 대도시에서 사전 주문을 통해 전량 소비되고 있다.


감태나루 앞 바다의 물이 빠지면 자연산 석화, 꼬막, 바지락, 낚지, 칠게 등 다양한 수산물이 사계절 생산되어 마르지 않는 마을 보물 창고라고 불린다. 

 

 

정 들었던 교정이 사라지다 

비옥한 농토로 인구가 많이 살았던 고금면에는 학구열이 타 지역보다 월등하게 높았는데, 초등학교가 4개소 있었으며, 가교마을 입구에 고금국민학교 가교분교가 1955년 7월 인가 받은 후 1958년 고금북국민학교로 승격되어 약 45여 년 간 운영되다가 2000년 3월에 농어촌 지역의 인구와 학생 수 감소를 이기지 못하고 고금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다. 고금북국민학교는 사실상 가교리, 교성리 2개 마을을 학군으로 하여 45년간 운영되었다는 점은 이곳 마을의 교육열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고금요양원(위 사진)이 이곳 초등학교 교정에 새롭게 터를 잡아 신축되어 어르신들의 노후를 책임지는 복지의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계속)

 


김선호 이장
정인호 담당관(가교마을 출신 공무원)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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