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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유배지 완도의 섬에서도 우두였다

  • 신복남 기자 sbbn2000@hanmail.net
  • 입력 2022.07.14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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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똘히 등잔불 밝혀, 골똘히 등잔불 손짓바람으로 꺼
긴 밤 풀벌레소리에 잠겨 안공부 하다가 
어느 해부터바깥공부에 눈떠 영국 제너 종두법 익혀 
처가 동네사람들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임오군란 때 우두 놓는 법 배워왔다고 잡혀갈 뻔하였다. 
양도깨비 되었다고 수군거리고 우두는 독침이라고 
내몰리는 동안 전주에 우두국 설치 공주에 우두국 설치
아이들에게 우두를 놓았다.

그 뒤로 천연두로 죽는 아이 싹 없어졌다.
유배지 섬에서도 우두였다.

해배의 몸, 뭍으로 돌아와서도 오로지 우두였다.
그러다가 우두의 삶 쉬고 주시경과 함께 국문 쓰기 제창 
국문 가로쓰기 제창 비로소 세종 훈민정음이 내몰려 
썩어 있다가 묻혔다가 백성의 글자로 뛰쳐나왔다.
드디어 고종황제의 반포, 훈민정음 자모로 
나라의 문서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나라 망한 뒤 백성의 글자 나라의 글자 남아 
그것이 나라이고 나라의 산천이었다. 
지석영, 일본의 회유 끈질겼으나 
조용히 물러나 여든 살 생애 마쳤다.
삶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 풍모 사립짝 안에서도 장중하여 예닐곱살 적부터 
장난이 없는 삶이었다.


지석영/고은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어릴 적 영화를 보려고 비디오를 켜면 이런 영상이 나왔는데, 3년이 넘는 기간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채 수그러 들기도 전에  다시 원숭이 두창(Monkey pox)가 고개를 서서히 들고 있는 요즘, 떠오르는 인물 하나는 천연두로부터 우리나라 국민을 해방시킨 지석영이다. 지석영은 조선후기, 완도 신지면 송곡마을로 유배돼 온 인물로 일본의 경제 침탈과 민씨 일파의 국고 낭비로 생활이 궁핍해진 구식 군대의 하급 군인들이 우발적으로 대규모 군란을 일으킨 1882년 임오군란, 개화파의 일원이었던 지석영은 긴급수배령을 받았다.

 

 

그가 차려 놓은 종두장이 구식 군인들에 의해 불타자 재빨리 피신했다가 상황이 안정되자 다시 상경해 우두 보급에 나섰다. 
그의 선배였던 박영교가 전라도 어사로 가면서 지석영을 불러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한 후 종두법을 가르치게 했다. 공주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개화파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27세였던 1881년 문과에 급제해 요즘으로 치면 검사인 지평 벼슬을 받고 어엿한 관리가 되었지만 이때 우리나라는 개화기를 맞으면서 혼란 정국이었다. 지석영은 임금에게 간언할 수 있는 장령(掌令)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조세 등 국정의 잘못에 대해 신랄한 상소를 올렸다. 


눈에 가시였던 민씨 세도가들은 당연히 그를 갑신정변에 연루시켜 탄핵했다.
박영효가 흉한 음모를 꾸밀 적에 남몰래 간계를 도운 자가 지석영이었고, 박영효가 암행어사가 되었을 적에 모질게 하라고 가르쳐서 백성들에게 독을 끼친 자도 지석영이었다. 흉물스런 저 지석영은 우두기술을 가르친다고 핑계 대고 도당들을 끌어 모았다.
- 《고종실록》 24권, 정해 4월

 

지석영이 유배와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보낸 신지면 송곡마을의 유배터. 
지석영이 유배와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보낸 신지면 송곡마을의 유배터. 

 

신지도에서 혹독한 위리안치형의 유배를 오게된 지석영. 5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야만 했지만 이광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동국진체를 보급한 것처럼 지석영 또한 우두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지도에서 풀려나와 다시 서울 교동에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에게 우두를 실시했다. 정영래 전 완도군 문화원장은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도 신지도에 유배된 인물이다. 그의 호 송촌(松村)도 유배지인 신지 송곡리에 있으면서 우두의 임상을 완료하고 <신학신설(新學新說)>이라는 의학서를 완성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호를 송촌(松村) 이라 했다. 송곡 촌에서 일생에 가장 보람된 일을 했다 하여 만들어진 호다"고 전했다.

 

 

1891년에 펴낸 신학신설(身學新說)은 천하 만물에는 이치가 있으며 그 이치는 증거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고 하였다. 지석영은 신학신설 본문 곳곳에서 서구 과학계의 실험 결과나 의학계의 해부 결과를 들어 기술 내용을 뒷받침하였고 독자들이 의구심을 가질 경우 직접 실험을 해 스스로 증거를 찾아보라며 실험 방법을 안내하기도 했다. 본문에서는 무병장수의 비결은 병이 나기 전에 조심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일상생활에서 빛, 열, 공기, 물, 음식, 운동의 여섯 가지에 유의해야 한다고 하며 관련 생활 수칙을 제시하였다. 송촌은 의학 발전뿐 아니라 농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밀농사의 가치를 주장하고 밀 농사법을 설명한 “중맥설(重麥說)”이라는 책을 지어 보급하였으며. 태음력과 태양력을 함께 쓰자는 주장을 널리 펴기도 하였다.


특히 송촌의 민본주의를 알 수 있는 점으로 그는 조선의 선비와 백성이 어려운 한자를 쓰기에 신학문이 일반백성에게 전파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쉬운 우리글인 한글의 보급을 위해 노력하였다. 주시경과 함께 최초로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사람도 송촌 지석영이다.


지석영은 민족사에 남긴 수많은 공훈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라는 오명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대구감영 판관으로 일본군을 도와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앞장섰다. 또한. 1909년 일본의 조선침략 선봉장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쓰러지자 이토오 히로부미의 죽음을 추도하는 모임에서 추도사를 읽었다고. 이러한 이유로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추진한 과학기술자 명예의 전당 등재를 거부당했다.


하지만 송촌은 1910년 8월 한일합방(경술국치)이 발표되자 주위의 청을 뿌리치고 대한의원에서 물러나 다시는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며 어린이의 병을 돌보았다. 다른 친일파와 차별되는 점인데, 한일합방(경술국치)이후 1935년 죽을 때까지 일본 군국주의자에게 협력한 어떠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 친일이 이뤄졌는 지 규명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는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많은 민중의 생명을 구해낸 사람이고 고은 시인의 말처럼 장난이 없는 삶을 살았다.  

 

  
신복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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