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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온몸이 흠뻑 젖는 빤스고개의 전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8.2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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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리 서중마을은 16~17세기 사이에 진주강씨가 제주도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머물다가 그대로 정착하였고, 이어 제주고씨와 곡부공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이 마을은 서편과 중리마을로 나뉘는데, 과거 4개반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지금은 3개반만 운영되고 있다. 

 

소안면에는 초등학교가 3개교가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이 진산초등학교. 
진산초교는 이곳 서중마을에 위치해 있었다.(지금은 태양광 시설로 이용되고 있어 모교가 없어진 아쉬움이 남음) 이 마을에는 일명 ‘빤스고개’라고 인근마을 맹선리와 진산리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 있다. 진산리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육지로 나가는 배가 맹선항에서 종선을 타고 여객선을 이용해 목포지역 등으로 육지를 오가는 유일한 곳이었다. 

 

 

서중리와 동진리에 거주하는 중학생들은 이 고개를 넘어 학교를 다녔었다.
배가 많이 고팠던 시절, 주민들은 그냥가기도 힘든 고갯길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이 고개 정상을 넘어다니곤 했다. 고개 넘어 맹선리 사람들도 진산리 들에 농토를 많이 보유하고 있어  직접 농사를 짓는 관계로 빤스고개를 넘어 농사를 지어 수확한 농산물을 이 고개를 통해 지게로 져 날랐다. 워낙에 가파르고 길이 험한데다가 올라가면 땀이 온몸을 흠뻑 적셔 ‘빤스가 다 젖는’, ‘빤스만 입고 다니던 고개‘라 하여 빤스고개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차량을 이용해 인근마을이나 소재지로 나갈수 있어 거의 이용이 안되고 있으며 옛사람들의 추억의 고개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빤스고개 옆쪽에는 시루떡재라는 곳이 있었는데 옛날 방 구들을 놓을 때 쓰던 구들장 돌이 시루떡같이 포개져 있어 한 장 한 장씩 떼어내어 지게에 지고 내려와 방 구들로 사용했던 곳이었다.
주변에는 지금의 복분자 딸기 같은 시루딸기가 자생하고 있었으며, 산두라는 열매의 밭이기도 한 곳이었다. 


학교에서 맹선리쪽으로 오다가 빤스고개를 넘으면 허기진 배를 싸간 도시락 그릇에 잔뜩 따서 담아와 집에서 먹던 산두의 맛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가본지가 오래되어 산두나무가 자생하고 있는지 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 마을에는 과거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1974년 11월경 서중항에서 장배를 이용해 노화읍에 열린 노화장을 보고 돌아오던 배가 맹선리 쪽에 있는 물치기미 근처 암초(여)에 배가 걸려 뒤집히면서 39명의 목숨을 앗아간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위령탑’이 중리마을과 동진리 마을 중간,진산교회 아래 세워져 있다. 지금도 그곳을 지날때면 그때 어렸을적 생각이 난다는 주민들. 


노화장배 사고는 심지어 부모님을 한꺼번에 다 잃은 친구들도 있었으며, 형제 자매도 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고였다.
마을앰프 방송에서는 구조하지 못한 사람들의 위치를 해녀를 통해 확인하고 위치까지 알려주는 등 구조작업 또한 긴박했던 상황이었다.


섬사람들이라 수영을 하면 살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워낙에 파도가 거세 바닷가 바위에 다다르면 파도가 다시 휩쓸고 가 인명피해가 더 컸다. 
사고 당시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하얀천으로 시신을 감싸매고 리어카에다 실고 오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 사고는 지금도 진산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안타까운 사고였을거다.  지금은 무인등대 표시로 더 이상의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도 해두었다.


서중 동진 소진 강윤기 이찬희 한용민 이장
김준혁 팀장/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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