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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물리면 돼지 생피에 백분 물 타 먹어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스토리가 있는 우리마을 소안면 진산리 6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2.09.3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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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집안에 소 한 마리만 있어도 자식을 대학에 보냈다고 할 만큼 소가 큰 재산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어린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산으로 들로 소 띠끼러 다녔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마을 뒷산 정상에 소를 묶어두고 소를 키우던 시절.
아침에 일어나서 산에 올라가 묶여진 소를 풀어주고 풀을 다 먹으면 다시 묶어두고 집으로 내려와 아침을 먹었던 시절이었다.


비가 올 때면 소를 집으로 끌고와 소막에 두고, 또 마을앞 들에 나가 물를 먹이곤 했던 기억, 우산도 없는 변변한 생활이라 일명 갑바로 불리는 어른들의 비옷을 입고 비를 맞아 가면서 소를 띠끼던 때, 지금에야 낭만스럽게도 여겨지지만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싫은 일이기도 했다고.
산으로 소를 띠끼러 다 닐때는 4-5년 동네 선배들이 사거리 진도리 놀이를 한다며 달 밝은 밤에도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산으로 다닐 때였다.
한참을 놀고 있는데 애기 울음소리가 들려 다들 놀라서 허겁지겁 산정상으로 가 마을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6세 때라보니 얼마나 무서웠던지, 검정고무신은 벗겨지고 빨리 못간다고 동네 형들한테 쥐어박히고 참 힘든 소띠끼기는 시절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소 띠기기는 여전했다.


하교후 산에 올라가 묶어두었던 소를 풀어주고 풀을 다 뜯어먹으면 다시 묶어놓고 내려오는 반복된 생활이었다.
신기했던 것은 풀을 뜯으러간 소들은 항상 그 시간이면 그 자리에 다시 온다는 거였다.


습관과 훈련의 결과인지는 모르나 어린나이에는 이러한 회귀성이 신기했었다.
그때는 산에 나무들이 어린 아이들의 키 정도의 나무밖에 없었었다. 그 만큼 나무를 많이 해 난방을 했던 시기라 그랬다. 지금은 산에 울창한 나무들이 들어선 건, 난방이 기름이나 엘피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어머니가 산에서 솔골나무를 해 다섯뭇을 혼자서 머리에 이고 내려오는 모습을 봤을 때 과연 어떻게 저리도 무거운 것을 혼자서 머리에 이고 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옛날 엄마들은 비탈진곳에 모아둔 솔잎을 탄력을 이용해서 머리에 이고 내려 오셨드랬다.


그 고생이 지금에 나타나 허리가 휘어지고 불편한 생활하시기에 자식으로써 대단히 죄송스럽다.
소띠끼로를 다니면서 독사에 물린 적도 있었다.
가을 추석 무렵 초등학교 6학년때의 일.
검정고무신을 신고 소를 띠기로 다니던 때라 뱀에 완전 노출된 발!
그 무언가가 살짝 꼬집는듯한 아픔!


이빨 자국 두 개가 선명하게 나 있어 뱀에 물렸다는걸 알았다.
뱀을 물리고 난후 치료를 위해 두달가량을 거의 매일 돼지피와 백반을 물에 타서 마시면서 치료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어린나이에 돼지피를 생으로 먹고 백분을 물에 타서 먹는 건, 지금 아이들한테는 상상도 못할 치료법이었다. 뱀에 물린 다리의 붓기는 깨금나무를 찧어 다리에 발라놓으면 붓기가 빠지기도 했었다.


한편 동진마을에는 3개마을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지명에도 사리때만 드러나는 ‘다물여’가 있으며 물이 빠진 다물여는 각종수산물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한, 진산리에는 넓다란 농토를 경작하기 위해 저수지를 막고 물을 가둬 농업용수로 활용했다.


‘구러시’라는 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끼가 있어 소가 쟁기질을 못할정도로 깊이 빠지는 논을 말한다. 구러시를 쟁기질한 소는 주인의 특별한 관리를 받고 자라났으며 집안에 소 한 마리 있으면 부자라는 말도 들었던 시대다.


계속)

서중 동진 소진 강윤기 이찬희 한용민 이장
김준혁 팀장/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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