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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빛 담장길 앞에서 너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 신복남 기자 sbbn2000@hanmail.net
  • 입력 2022.10.2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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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도 아끼면 빛난다. 밤이 오면 불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대신 샛별이 지키고 있었다. 


빨간 사루비아 꽃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바라보고 있다. 아직도 마당에 사루비아 꽃씨가 떨어져 해마다 핀다. 어머니가 좋아한 꽈리가 토방에 걸려있다. 세월에 변색이 되었더라도 어머니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딸들의 눈 건강을 챙기기 결명자도 마당에 심었는데 이젠 스스로 씨가 떨어져 열매를 맺는다. 


얼마나 애정이 많았으면 가꾸지 않아도 스스로 자랄까. 어린 날에 아버지가 손수 사랑채를 지었다. 여기서 딸들이 생활해왔단다. 노란 결명자 꽃과 빨간 사루비아 꽃을 키웠던 부모는 자식들과 한 몸으로 자라게 했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식들을 아름답게 키우기 위해서다. 이젠 육십이 된 큰딸은 시인이다. 


사루비아 꽃이 시인으로 가게 하는 셈이다. 긴 세월이 엮어진 담쟁이 잎이 가을을 물 드리고 있다. 아버지 솜씨와 세월이 엮어진 집이라 퇴직하면 여기서 묵을 생각이고 한다. 
어린 날의 추억이 여기에 다 묻어 있어 글을 쓰기에 좋을 거라고 한다. 창문 넘어 느린 햇빛이 좋다. 세련된 다자인보다 오래되고 낡은 것이 좋다. 여러 하모니보다 두 개의 멜로디만 있으면 좋다. 


세상이 잠시 멈춰 있고 가장 좋아하는 것 하나만 있으면 된다. 듬성듬성 담쟁이 잎이 가을 하늘을 달고 있다. 오래된 나무집이 그 세월을 읽고 있다. 어머니는 가을꽃을 좋아한다. 꽃잎이 연하디연한 물봉숭아 꽃잎이 차가운 가을 햇살에 간신히 피었다. 아들 둘, 딸 셋을 여기에서 낳았다. 


그런데 공군 조종사인 큰아들이 훈련 중에 잃었다. 어려운 시대에 힘들게 가르쳐 곧 대성 길에 이르렀는데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다른 자식을 위해 속으로만 만날 수밖에 없는 큰아들이 하늘에서 큰 별이 되었다. 5월에 푸른 담장이 되었다가 이제는 주홍빛 담장이 되었다. 오래 쌓아놓은 긴 세월이 아련한 추억으로 가고 있다. 


이런 담장 길에서 좀 더 천천히 걷는다. 조용히 흐르는 물처럼 너와 함께 흐르고 싶다. 오래된 사랑채는 슬픔과 기쁨 그리고 삶의 애환을 담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랑채는 아버지의 삶과 같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운명은 가냘프게 걸어왔다. 


그러나 가을 햇살은 이들에게 미소 짓게 한다. 아침저녁 날씨가 쌀쌀하다. 그러나 어머니 배추밭은 넉넉하게 감싸고 있다. 
인고의 세월을 켜켜이 쌓아둔 집. 단것보다 쓴 것만 아는 집. 한때는 희로애락이 함초롬히 담겼던 집. 이제는 천천히 쉬어 가자. 혹시 더디 세월이 가더라도 빨리 가지마라고 할 것. 우리네 마음들이 여기서 내려놓고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 기다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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