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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왔는데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 이야기 정앵자(69세) 소안도 해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2.2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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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왔는데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친정이 죽굴도인 정앵자 씨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50년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하기 전 살았던 죽굴도는 겨우 몇 가구가 살아가는 전형적인 낙도. 
정기 여객선인 새마을호(현, 도서낙도보조항로)도 손님이 있어야만 기항을 하였다. 
열아홉살 어린 나이에 외할머니의 중매로 섬에서 섬으로 시집을 왔으니 여러가지로 낮설고 힘들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을 왔어요, 신랑이 찾아와서 딱 한 번 보고 시집을 오게 됐지요″ 
모든 것이 물설고 낮설었지만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고 한다. 스무살에는 살림밑천이라는 첫딸을 낳았다. 
″결혼을 하니 제일 좋은 것이 깨끗한 물을 얼마든지 쓸 수 있었어요" 


"죽굴도는 물이 굉장히 귀해서 마음대로 쓸 수 없었는데 여기는 물 하나는 마음껏 쓰니까 그렇게 좋았습니다″ 
잠수는 첫딸을 낳고서 스무살에 배웠다고 한다. 


″제가 살던 죽굴도는 바닷가에서 수영을 배우기가 좋았어요. 초등학교 때 방학이면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여름이면 바닷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수영을 아주 잘 했어요. 어느 날 해녀들을 보고서 나도 수영을 잘 한다고 했더니 해녀를 한 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겁도 없이 고무옷(슈트)을 먼저 덜컥 구입했습니다″


당시에는 큰 돈인 25,000원을 주고 부산에서 슈트 일체를 구입했다고. 그러나 의외로 물질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수영하고 잠수질하고는 너무나 달랐다는데, 고무옷(슈트)을 입으니 납덩어리를 묶어도 물에 가라않지 않아서 처음에는 무지 애를 먹었다고. 


딸아이는 다행히 시어머니가 잘 돌보아주어서 마음 놓고 바다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적응할 무렵 둘째 애가 생겨 물질을 잠시 쉬게 됐다고. 
″물질에 막 재미를 붙일려고 하는데 스물 두 살때 둘째를 임신하였어요." 
"남편이 물질을 못 다니게 해서 한동안 쉬다가 둘째를 낳고서 다시 물질을 시작했죠." 


"둘째는 쌍둥이 아들이어서 시댁에서 좋아했어요 ″ 
둘째 쌍둥이를 낳고선 친정인 죽굴도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고 한다. 
″친정 아버지가 시집오기 전부터 멸치어장을 했는데 어장이 잘 됐어요" "친정 오빠와 삼촌, 나 이렇게 셋이서 어장을 했는데 이익금을 나누다보니 생각만큼 돈을 못 벌었어요" "그래서 1년 동안 고생만 하다가 다시 미라리로 돌아왔어요″ 


그러는 사이 넷째 아이가 생기고 또 아들을 낳았다. 시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아이 넷을 키우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넷째를 낳고서는 물질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김양식에 뛰어 들었다. 
″김 양식은 15년 정도 했어요, 무슨 일이나 안 힘든 일이 없지만 김 양식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여서 겨울철에는 김을 양식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물질을 다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해녀를 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물질해서 아이들 용돈을 충분히 주고 4남매를 모두 목포로 유학 보낸 것이라고 한다. 


 ″저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했거든요, 초등학교도 분교였지만 우리 학년은 두명이었고 선생님이 육지에 나갔다가 날씨가 안 좋아 배가 없으면 일주일을 그냥 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에 한이 맺혔어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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