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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로 아홉명의 대가족을 거느리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3.0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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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란 것이 참 무서워″ 
″우리 아저씨는 나보다 한 살 어린디 해녀배를 같이 탔당께! 근디 그 배에 우리 엄마도 같이 타고서 보길도, 노화도쪽으로 난바르를 다녔어! 좁은 배에서 생활하다보니,, 그러다 정이 들고...″ 


청산도의  손예순 해녀는 먼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손 해녀는 제주도의 또 다른 섬, 우도의 하원목동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태어난 곳은 큰 동네였어"


"그런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가 문주란으로 유명한 하도로 이사를 와서 거기서 살았제, 엄마는 물질다니고 나는 할머니와 살았어″
손 해녀는 열 세 살때까지 하도에 살다 엄마가 청산으로 원정 물질을 오면서 같이 따라왔다고 했다. 


제주 출신들이 그러하듯 손 씨도 엄마와 같이 살면서 물질을 배웠다고.
당시에는 난바르를 많이 다녔는데 그곳에서 열아홉  나이에  신랑을 만나 20세에 결혼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연애 결혼을 했지만 결혼 전에 연애 할 때는 나이도 어리고 날마다 보는 얼굴이어서 가슴이 뛰거나 신비한 같은 것이 없었제"
"또, 엄마가 신랑을 사위 삼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시아버지 될 사람이 당시로서는 연세가 좀 있었어!" "또 손 귀한 집인디 그래서 빨리 손을 봐야 한다고 결혼을 서둘러서 멋도 모르고 해부럿제″


당시에는 대부분의 해녀들이 음력 정월부터 8월까지 일을 하면 추석 무렵 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원정 물질 나온 해녀들이 추석이면 대부분 제주 고향집을 다녀왔고 목돈을 받아 집에 다녀왔다고.


결혼은 겨울에 했는데 결혼자금으로 20만원이 있었다고. 
손 해녀는 ″결혼 날짜를 잡고 살림살이를 준비해야 하는데 시부모님이 아무 것도 해오지 마라고 하드라고" 
"그래서 20만원으로 여수에서 솜을 사다 이불을 만들어서 시집을 왔제″
결혼식은 구식 결혼으로 청산에서 했는데 같은 마을(면 소재지인 도청리)에서 가마를 타고 왔단다. 


″결혼을 했는데 신랑은 철이 없어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그랬어! 그래도 2년 터울로 애들이 생긴디 우리 시아버지도 좋은 분이셨지만 시어머니는 더 좋아!" 
"내가 물질하러 댕기면 시어머니가 애들을 다 봐주고 살림을 해줬거든. 그래도 잔소리 한마디 없으시고 단 한번도 구박을 안했어″      

   
20대 후반 상군으로 해녀 생활을 할 때는 집안에 아홉명의 식구가 살았다고 한다.
″시부모님 모시고 우리 부부에다 애들 네 명에 어린시아제가 계셨어. 그때는 밥을 많이 먹는 때라 80kg 쌀 한가마가 20일이면 바닥이 나부러 농사는 없제 먹고사는 것이 참 힘들었어....″

 

손 해녀는 4명의 자식들을 뒀는데 이제는 자녀들도 모두 결혼을 시키고 손지들도 봤기 때문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고. 소원이 뭐냐고 묻자, 손 해녀는 "공부를 실컷 한 번  해보는게 꿈이제"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했어. 엄마는 물질 다녀야하고 오빠 집에 10살 밑에 조카가 있는데 오빠 아들 이었거든 그 조카를 봐야되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어″


배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의 얼굴을 하면서 이제, 애들에게 보낼 파김치를 담근다고 분주히 움직였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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