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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봄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3.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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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리지 않고 걷기에 좋은 바람이 목덜미에 닿았다. 아침의 냉랭한 기운과 따사로운 햇살이 묘한 감각을 만들었다.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이 녹아내리고 있다. 건조하고 딱딱한 흙에서 봄 공기를 밀고 싹이 올라오고 있다. 물비린내 같은 땅 냄새와 분주하게 달리는 자동차 매연이 섞여 출근 시간임을 각인시켰다. 


횡단보도를 건넜다. 건물 전면을 절반쯤 가린 상설할인 매장 광고판이 환하게 바뀌었다. 유리 벽 너머에는 봄으로 갈아입은 마네킹에 아직 겨울인 사람이 반사되어 어룽거렸다. 겨울을 털어내듯 앞섶을 열어 바람을 일으켰다. 옅은 섬유 유연제 향이 걸음을 더 가볍게 했다. 불협화음처럼 콘크리트 건물 옆으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꽃잎을 열기 시작한 가지에 봄을 품은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늘진 편의 가지에는 희끄무레한 봉오리가 터질 듯 맺혀있고, 햇볕이 잘 드는 쪽에는 매화가 물기를 촉촉이 품은 채 하얗게 고개를 쳐들고 있다. 매화향이 내 코앞까지 봄을 데려왔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난 뒤에 이 사진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된다면 출근길에 만난 매화의 안간힘을, 어느 봄날 출근길의 촉감을 나는 기억해낼까. 의뭉스럽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도서관이다. 계절과 어울리게 북 큐레이팅 된 전시대로 여린 햇빛이 들어온다. 여타의 직장처럼 분초를 다툰다거나 분주한 일상의 리듬과는 시간이 조금 달리 흐르는 것 같다. 


태평스럽게 천천히 내려앉는 봄 햇살처럼 시간이 여유롭게 흐르는 곳이란 생각을 한다. 출근을 서두르면 도서관 문을 열 때까지 지금처럼 지나간 시간을, 다가올 시간을 멍하게 앉아 들여다볼 수 있는 틈을 만들 수 있다. 며칠 전 독서 모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너도나도 봄이라서 좋다고 했다. 누군가가 왜 봄이 좋은지 물었더니 새롭다거나 희망적이라거나 이런 대답이었다. 나는 '글쎄'라는 말로 대신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지금까지도 '왜'를 끊어내지 못하고 틈만 나면 봄을 살피고 있는 걸 보면.
봄은 당연하다는 듯이 다들 새로움과 희망 그리고 시작을 이야기했다. 모두가 기다림의 끝처럼 맞이할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봄은 온통 애쓰고 있는 것투성이였다. 아침에 봤던 매화는 엄동설한에 꽃눈을 품었고, 흙먼지 풀풀 날리는 맨바닥에서 손톱보다 작은 꽃들이 있는 힘껏 피고 있다.


그뿐인가 둥치가 굵은 나무도 겨울을 견디느라 여기저기 꺾이고, 패였다. 어쩌면 봄은, 지난날의 깊은 어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마지못해 꽃을 피우는지도 모른다. 다시금 볼품없이 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방식으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낑낑대면서, 봄이라서, 꽃이란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애쓰며 본분을 다하고 있어서 봄은 희망이란 단어와 잘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중심상가를 걷다 보면 시들어버린 화분들이 가게 문 앞에 놓여 있는 경우가 보인다. 유리문에 ‘임대 문의’라고 쓰인 종이도 종종 마주친다. 어둡고 텅 빈 영업장, 문틈에는 우편물과 광고 전단이 꾸역꾸역 끼워져 있기도 하다. 크고 작은 절망이 이곳저곳에 불어닥치고 있다. 마치 칼날을 품은 겨울바람처럼. 나는 지금 모두가 견디고 애쓰는 중이라 생각한다


현재가 절망적일수록 사람은 더욱 미래에 기대고 살아간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미래에 희망을 품고 그걸 오늘을 견디는 힘으로 삼는 사람들. 시린 겨울을 지금 막 지나고 있는 사람 앞에는 당연하듯 봄이 서 있었으면 한다. 비록 추상적이긴 해도 '희망'이란 대답을 품고서.


겨울의 경계선은 점차 옅어진다. 온기를 품고 바람이 불어오고 머지않아 윤중로는 꽃놀이하는 사람들로 북적일 테고 . 긴 기다림의 끝에 맞이했던 봄은 지나가고 또 다른 계절은 다가오고. 아홉 시가 되면 도서관 문은 열릴 것이고 이런저런 생각도 나는 멈출 것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이 도서관에서 여유 있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이런 문장에서 한숨 돌리고 밑줄 그었으면 한다.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 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

냉랭한 기운과 따사로운 햇살이 묘한 감각을 만드는 걷기에 좋은 봄바람이. 
                    *김연수-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김지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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