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악물고 3년 해녀 최고봉 대상군 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3.23 13:14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첫 인상이 좋으면 다 좋다.
오경순 해녀가 딱 그렇다.
″내일 오전 11시까지 와 그라먼 시간이 된께″
다음날 아침 전화벨이 또 울렸다. 


″낼 비온다 한께 우리 전복양식장 비설거지를 해야 쓰것구만, 오후에 오면 좋것어″
그렇게 해서 오경순 해녀를 만나러 금일로 향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퍼 부을 듯 먹구름이 가득하다. 철부선에서 내려 동백리에 도착하니 인상 좋은 오씨가 반갑게 맞아 준다.


금일읍 동백리에 살고 있는 오경순 해녀는 북제주군(오늘날 제주시) 구좌읍이 고향이다. 
그곳에서 18세까지 살다 동네 언니들을 따라 금일읍으로 물질을 왔단다.
″우리 때는 다 그랬지만 고생 안한 사람이 없잔애. 나도 고생한 것을 이야기 할라먼 몇 날 며칠을 해야 해″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학교에 가지를 못했어. 친정아버지가 술과 도박으로 집안을 돌보지 못해서 엄마가 학교를 못다니게 한거여. 그러면서 남자고 여자고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산다고 물질을 가르켰제″
″공부하느라 물질은 아예 몰랐제" 


"엄마가 두룽박을 물에다 던져놓고서 주워오라고 시켜! 그런데 사람은 환경에 적응한다고 그게 되더라고"
"사촌 언니들이 물질로 돈을 벌어서 땅을 여기 저기에 사니까 나도 열심히 돈을 벌어서 땅을 사고 싶더라고" 
"이 악물고 물질을 배웠지″


오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님의 농사를 도와드렸다고 했다. 
그러나 18세가 되던 해 봄, 사촌언니들을 따라서 금일읍에 오게 됐는데 물질이 서툴러서 깊은 바다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언니들의 밥을 해주거나 빨래를 빨아주는 등 요즘으로 말하면 어시스트(써포터) 역할을 하였다고.


″타향에서 서러운 생활을 하는데 가을이 되니 낙엽이 지면서 그렇게 고향 생각이 간절하더라고. 그런데 나이도 어렸고 교통 또한 편리한 것도 아니어서 집에도 못가고 눈물로 몇날 며칠을 지새웠는지 몰라″


그렇게 물질을 시작한 오씨는 이를 악물고 버틴 3년 후 해녀의 최고봉 대상군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 마을 언니들은 매년 금일 동백리로 원정 물질을 다녔는데 나도 22살 봄에 같이 왔어. 그때 세 살 연상의 우리 아저씨를 만났제. 1년간 연애를 하다 결혼했어″
″결혼식은 동백리 마을 회관에서 드레스를 입고 신식으로 했는데 제주에서 친정식구들이 모두 왔어″ 


물질하면서 기억에 남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말하니, 오래 전 이야기를 꺼냈다.
″30대 때는 황제도에도 물질을 많이 다녔는데 바다는 항상 위험하잔애. 황제도까지 발통선은 보통 두시간 반 이상을 가야한디 그때만 해도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고 그래서 안개가 제일 무서웠어!" 


"갈때는 날씨가 좋은데 올 때는 갑자기 안개가 끼거나 파도가 치면 고생이 많았제″
″한 번은 엔진이 고장나서 배가 표류를 시작하는데 밤새도록 표류를 한 적이 있었어. 지금 같이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끝이구나 하고 모두 고무옷(슈트)을 입고, 오리발을 신고, 수경을 쓰고,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했는데 다행이 우리 아저씨가 배를 고쳐서 가까스로 살아난 적도 있었지″  


자녀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결혼하여 광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학교를 다니다 못다녀서 우리 애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광주로 유학을 시켜서 대학까지 보내고 했어. 그 돈을 다 합치면 삘딩을 하나 샀을 것이여″
물질은 앞으로 3년만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 바다 계약이 끝나기 때문이다고.


″우리도 200칸 정도 전복 양식을 하는데 중간패를 사다 1년 후 성패로 팔아. 올해는 전복금이 안좋아 본전이나 할랑가 모르것네. 그래도 미역, 다시마 막음서 고생한께 돈을 쪼간 벌어서 쓴디 성가시구만″


오씨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세월을 이기지는 못해 3년 후엔 해녀를 꼭 은퇴하겠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