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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하면 금메달, 역도에 함께 웃고 함께 울던 완도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3.04.1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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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중의 시인,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한다. 
"젊은 나이에 시(詩)를 쓰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할 수만 있다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삶의 의미와 감미를 꿀벌처럼 모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몇 줄 쓰는 것, 그것이 바로 시(詩)다"고. 
그 말은 곧, 한 줄의 시에서 한 생의 전모가 드러나는 것. 나의 모든 순간 순간이 그 한 줄에서 멈춰서야 한다는 말로, 문학의 시(詩)와 가장 닮은 스포츠를 꼽으라한다면 역도를 꼽을 수 있겠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과 모든 기술, 정신과 마음까지 모으고 모아 한순간에 폭팔시키면서 무거운 바벨을 들어올려야 하는 역도. 그래서 시와 닮았다. 
위대한 시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문학은 시인이 탄생시킨다고 했듯 모든 운동의 기초가 되는 역도, 최경주 선수 또한 화흥초를 졸업하고 완도중학교 시절 역도 선수로 활약하다가 고등학생 때 골프로 입문해 세계적인 선수가 됐다는 건 완도 체육인들 사이에선 잘 알려진 이야기.


도민체전 D-30을 맞아 완도군청 역도팀을 소개하고자 주무부서장인 최광윤 과장과 약속했는데, 그 자리에 군청 역도팀의 서호철 감독이 함께 나왔다. 
서 감독에게 솔직히 그동안 역도팀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면서 그건 군민에게 쓸 군비도 부족한데, 뭐하러 타지의 선수들까지 키워야 하나 이런 생각이었다고 했더니, 서호철 감독은 소안면 출신으로 완도중학교에서 역도에 입문했고 현재 군청 소속 선수들 또한 완도출신이라고 했다.


그러며 완도역도는 1979년 완도중학교에 역도부가 처음 생긴 이래 지난 44년 동안 해마다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아, 이건 무엇인가 있겠구나 싶었고, 단순히 서 감독과 선수들만을 소개할 게재는 아니라는 판단.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최광윤 과장은 "의원들도 완도군청 역도팀의 홍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여러번 있었다"고 했다. 
왜, 완도군청에서 실업팀으로 역도를 키우게됐는지, 과정이 필요해 보였다. 또 도민체전을 준비하고 치뤄지는 기간이라서 완도 역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함께 자리했던 완도중학교 출신의 황인선 체육진흥과 팀장은 "그 당시 완도중학교 역도부 학생들은 전국대회에 나갔다고 하면 금메달을 따왔고, 그들이 금메달을 따오면 전교생이 교문 밖으로 나가 양 길가에 정렬해 박수를 치면서 응원했던 기억이 있었다"고.


한 번은 전국대회 수상자들이,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단상에 올라 시범을 보이는데, 한 선수가 대회 때 들었던 무게로 들다보니 힘이 딸려서인지 역기를 들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교장 선생님 쪽으로 다가가니, 교장 선생님이 혼비백산 도망가는 모습에 학생들모두 박장대소했던 에피소드를 전했다.


당시 완도중학교에선 역도뿐만 아니라 정구와 권투수영 펜싱부까지 다양한 종목의 운동부가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건 역도였다고, 

 

 

또 완도에서 카퍼레이드를 한 사람은 최경주 선수와 이윤리 사격선수뿐인데, 당시 전국 제패를 했던 완도중학교  역도선수들은 밥 먹듯이 했다고. 
그때는 가두에는 많은 주민들이 나와 이들의 금메달 소식에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고.


이소미 프로골퍼의 작은 아빠 이보현 선수는 중학생시절 전국 3관왕을 차지하며 카퍼레이드를 했고 그때 이보현 선수의 3관왕 현수막은 지금 지방선거 현수막 때보다 더 많은 현수막으로 거리를 도배했다고.


맨위 카퍼레이드 사진 중, 지훈민 선수와 서호철 선수의 이름이 보이는데, 서호철 선수는 현재 완도군청 감독이고, 인터넷 검색 중 지훈민 선수의 기사에는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분전했지만 다잡은 메달을 놓친 불운의 역사(力士)라면서 이후 전국체육대회 역도 금메달로 아쉬움을 달랬다 내용이 나오는데 당시 24세 지훈민 선수(사진)는 제89회 전국체육대회 역도 62kg급에서 인상130kg, 용상158kg, 합계 288kg을 들어 올려 대회 3관왕을 차지했다.


지훈민 선수에게 베이징올림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는데, 같은 실업팀 소속(고양시청)의 장미란 선수가 역도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자신은 역도에서 실격을 당한 채 쓸쓸히 귀국해야만 했다고.


2개월 뒤, 절치부심으로 임한 전국체전 역도경기에서 지 선수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며 금메달을 획득해 국가대표 출신다운 저력을 발휘했는데, 해마다 작은아버지와 중학교 은사인 이영래 교사를 만나기 위해 완도를 방문한다는 지 선수는 “베이징올림픽은 출전 자체로 위로를 삼았고 국내에서는 큰 시합인 전국체전에서 생애 처음으로 3관왕에 올라 너무 기쁘다.”며 “시합을 앞두고 꼭 먹는 완도산 전복죽이 효력을 발휘한 것 같다”고 익살을 부렸다는 기사 내용이다.


완도 역도 1세대들을 보면, 강래식 지우현 정해동 서민구 이영래 최홍준 임대한 이보현 고광구 장명철 양정민 등이 소년체전 메달리스트라고 완도역도에서 빼놓을 없는 인물들이고 완도 역도의 경우 후원회까지 있어 전이양 대성병원 원장을 비롯해 의약사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여기서 하나같이 완도역도의 산증인으로 꼽는 이가 있다. 지훈민 서호철 선수의 카퍼레이드 사진 뒤쪽으로 보이는 카퍼레이드 차량에 코치 이름으로 이영래 교사의 이름이 보이는데, 둘 모두 완도역도 하면 “이영래 은사님이다”고 했다.


서호철 감독은 “완도중학교 이영래 선생님은 1993년부터 청해역도관에서 역도를 지도해 오고 계시는데 선수 발굴은 완도읍뿐만 아니라 주변 신지, 노화, 보길, 소안, 고금, 약산도 등에 이르기까지 주변 섬 지역의 영재선수들을 발굴부터 양성까지 책임지면서 완도 역도의 버팀목이다”고 전했다.


이영래 감독과 완도중학교 동창이다고 밝힌 한희석 기획예산실장은 "영래는 실력도 뛰어났지만, 그의 진면목은 지도자로서의 인품이었다"고
"대개 운동하는 친구들의 집안은 어려운 사정이라서, 제자들이 방황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친구들을 하나같이 자식처럼 조카처럼 여기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숙식 수발을 자처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은 정말 친구지만 깊이 존경할만한 대인의 풍모가 전해진다"고 말했다. 


모든 게 그렇듯 재능만이 아닌 것. 
스승은 기술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가 잘 돼 금은보화의 보은은 꿈에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뛰어넘는 청출어람이 보은이라면 보은. 그 청출어람을 다시 세상을 향해 돌려주는 것.


그것이 역도(力道)이다. 
그때야말로 역도의 도는 도(道)가 된다.
도(道)에 있어 최고는 시(詩).


서호철 감독의 이야기를 쓰기 전, 이영래 감독부터 만나봐야겠다는 생각.
그는 시인일까. 최광윤 과장에 말에 의하면 이 감독은 말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겠다. 시(詩)는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고자할 때 하는 거니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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