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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삔 큰애기는 동백리에서 동백리로 시집간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4.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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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동백리 해녀분들을 만나기로 하고 약산 당목항을 출발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렵게 연결이 되어 만나기로 하고 부랴부랴 약속 장소인 그의 집에 도착하니 김옥심 씨와 유흔희 씨가 함께 있었다. 
″물질 갔다와서 뻐쳐 죽것구만 머할라고 그라고 만날라고 했싸까~잉″?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 좀 들어볼라고 그런데 시간을 쪼금만 내주시면 됩니다″ 
″내 인생을 이야기 할라먼, 책으로 몇 권을 써야 쓰것인디? 그래도 다 못써~″ 


물질을 다녀와서 막 샤워를 마쳤다는 김씨는 이장댁에서 옻닭을 먹게 준비해 놨다며 빨리 가야된다고 서둘렀다.
10여분의 인터뷰 동안 몇 번의 전화벨이 더 울리고 자리를 뜰려고하자 우선 사진을 찍었다.
″활짝 웃어주세요~″  


김옥심 해녀는 동백리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동백리 청년과 연애로 결혼했다고 한다. 
동백리는 금일읍에서도 큰 마을로 처녀 총각이 많았는데 『이삔 큰애기는 동백리에서 동백리로 시집간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내 처녀총각끼리 연애결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우리 아저씨가 나를 보고난 후, 죽자 살자 목숨 걸고 쫒아 댕게, 그란디 우리 친정엄마가 절대로 연애를 못하게 말기는 거여, 그래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 보자 하고 아무도 모르게 서울로 도망을 가버렸제, 그랬듬마 우리 아저씨가 어떻게 알고 또 거그까지 찾아왔네, 그래서 열 아홉 살 때부터 걍 동거를 시작해 부렀어″


김 씨는 원래 뜨개질과 미싱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때 미싱을 전문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남편이랑 같이 정말 열심히 일했제" 
"우리가 옷 공장을 했거든. 하청을 받아서 옷을 만들어주면 돈을 받는 것이여! 
"그란디 그때만 하더라도 어음이나 외상이 많잔애. 일은 죽기살기했는데, 돈을 많이 못 받았어! 그래서 걍 고향으로 내려와 부렇제″       


해녀를 어떻게 하게됐는지 궁금해하자 그녀는 ″동백리 애기들은 전부다 수영을 다 잘해. 섬 애기들이 으디서 놀것어 애릴때부터 바닷가가 놀이터제" 
"나도 수영 하나는 자신이 있었거든.... 물질은 1986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하기 시작했어" "나이도 한창 때지만 애들도 걸음마를 하고 마을에 해녀들도 많고 해서 갓물질을 쉽게 배웠는디 지금도 해삼을 전문으로 잡고 있어″


김 씨는 올해까지만 물질을 할 계획이라고 한다.
″도와주는 선주의 어장권이 올해로 끝나거든! 인자 나이도 있고 애들도 못하게 하고, 동백리 바깥은 파도도 쎄고 선착장을 막으면 생각도 못한 곳에 뻘이 쌓여 또 바다속에 생활쓰레기도 많고 무엇보다 잡을 물건이 없어″


해녀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좋은 이야기를 하나와 안 좋은 이야기 하나만 들려주라 하자, 김옥심 해녀는 ″서울에서 내려와서 물질을 배우고 첫 바다에 들어간 날 5,000원을 받았는데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해" 


"그때는 다른 해녀들에 비해서 바다도 잘 모르고 했지만 전복도 많고 해삼도 많고 정말 수산물이 바닷속에 풍부했어. 그래서 참 재미 있었지″
안 좋은 기억도 있냐고 묻자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이런 이야기해도 될랑가 모르것소" 


″몇 해 전 불가사리 구제작업을 했거든. 그란디 돈을 한 푼도 못 받았어. 일정부분 건저내야 무게를 달아 돈을 준다고 물속에 살려두라고 한디" 
"생물이라 죽어 불고 죽으먼 썩어서 없어져 불고 고생만 엄청나게하고 돈은 진짜 한 푼도 못 받았어″하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며 "인자 가야 혀"
얼굴에서 마치 누님 같은 푸근함을 준 김옥심 해녀는 마을이장과의 약속 때문에 빨리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떠났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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