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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로 2남1녀 초등학교 때 모두 서울로 유학보냈죠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4.27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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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그 눈망울에 별이 사는 듯한 큰 누님 같은 유흔희 해녀를 동백리 이장댁에서 만났다.
김옥심 해녀와 같이 물질을 다녀와 마을이장님과의 점심 약속 때문에 시간이 없다던 유흔희 해녀는 이장댁으로 오면 기꺼이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달려갔다.


동백리 이장 ″우리 누님 애기(이야기)는 난테 물어보씨요. 내가 다 애기 해주께″   

 

 

유흔희 해녀의 말 ″너는 잔, 카만 있어야!″
동백리 이장 ″아따 누님 애기는 내가 쫘악 끼고 있는디″  
동백리에서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유 씨는 동백리 청년과 2년간의 연애 끝에 아저씨의 끈질긴 프로포즈를 받고 마침내 스무살 꽃다운 나이, 마을회관에서 구식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한 마을에서 살다보니 다 잘 알고 그래서 결혼했어요" 
"우리 시부모님이 참 좋은 분들이셨거든요" 
"아저씨가 장남이었는데 밑으로 시누이가 3명, 시아주버님이 한분 계셨어요″ 
″나는 애들을 2남 1녀를 두었는데 우리 시어머님이 애들을 다 키워주셔서 물질을 편히 할 수 있었어요" 
"물질을 다녀오면 시어머님이 집안일도 많이 도와 주셔서 시집살이 없이 살았습니다″


올해까지 50년을 해녀로 살았다는 유씨는 물질을 어떻게 배웠냐는 물음에 ″우리 동백리 애기들은 남자나 여자나 다 수영을 잘했어요" 
"그란디 동백리는 여자애들이 수영을 잘하면 해녀를 시켰거든요, 동백리는 바다도 넓고 수산물도 많아서 그때는 해녀를 하면 집안에 경제적인 여유도 생기고 해서 저도 열 일곱 살 때 물질을 배웠어요″
″1970년대 초반에 물질을 시작 했는데 그때는 무엇이든지 변변찮았잔애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데 물질을 배울 때 물옷(소중이)을 입고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 옷을 입고 배웠어요" 


"기술은 제주해녀들한테 많이 배웠고, 고무옷(슈트)을 맞춰서 입고 물질을 정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유씨는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그때 물질이 참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정말 물질을 하면 전복이나 소라등이 지천에 널려 있었어요" "전복이 보통 500g 이상씩 나가는 것도 많았죠" 


"나는 1.5kg짜리 전복을 잡아봤는데 껍질만 당시 돈으로 3,000원을 받고 팔았어요" "기념으로 보관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3,000원이 큰 돈이어서 팔았는데 다시는 그런 전복을 못 잡아봐 안타깝기도 한데, 기억이 참 안지워지네요″   
유흔희 해녀는 섬에서 보기 드문 자녀교육의 열혈맘이었다고 한다. 


2남1녀를 초등학교 때 모두 서울로 유학시켰다고. ″우리는 못 배우고 못 입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았잔애요, 우리 때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갈려면 걸어서 왕복 8km다녀야 해서 부모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을 안시켰어요" 
"그래서 애들만큼은 모두 서울로 유학을 보냈어요. 아파트를 전세 얻어 대학까지 졸업시켰습니다″


어렵게 공부시킨 애들이 모두 시골에서 산다고 했을 때는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자녀들이 주변에서 살고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고. ″세 자녀 모두 동백리에서 전복과 김양식을 하고 있어요, 큰 아들이 결혼을 안해서 안타까운데 그래도 아들과 딸 손지들이 8명이나되요" "딸과 사위도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어 마음이 든든합니다"  
유씨는 언제까지 물질을 할 줄 모르겠지만 지금도 물속 시야가 안 나오면 절대 무리해서 물질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은 사람들이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전복양식장 폐자재와 로프, 생활쓰레기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물속 시야가 안 나오면 절대 물질을 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나서면 하루에도 수백번의 다이빙을 하는 고된 삶속에서도 50여 성상을 바다와 공존하며 열혈맘으로 살아온 유흔희 해녀의 삶에 대한 가치에 존경을 표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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