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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된 사랑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5.2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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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달린다. 놀란 피가 손바닥부터 팔뚝을 지나 정수리까지 내달린 게 분명하다. 뻐근한 목덜미까지 부드러워졌다. 지압 볼을 쥐고 힘을 줬다가 뺀 손바닥은 돋을새김 됐다. 몸체 돌기가 제법 사나운 이 자그마한 것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온 지가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어느 날부턴가 어머님이 건강용품을 사 오기 시작했다. 
순전히 병치레가 잦은 며느리 때문이었다. 물리치료기부터 시작해서 발 마사지기. 안마기. 옥 장판 등 집안이 마치 의료기기 체험관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주관도 뚜렷하고 냉철한 사고력을 지닌 분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몸에 좋다"는 말만 하면 귀가 얇아지는 건지 아니면 며느리 건강에 대한 염려가 어머님 삶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어서 그런 것인지. 하나둘 늘어난 건강용품이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건들을 밀어낼 판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수술받고 병원에 있을 때였다. 


일흔이 넘은 분이 병문안을 왔다. 삼복더위에 백숙을 끓여 냄비째 들고 오셨다. 직접 발라낸 살점을 입에 넣어 줬다. 


마음은 가시방석이었지만 어머님 진심을 알고도 남음이었다. 그래서 참 맛있게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보내고 가시면서 내 손에 지압 볼을 꼭 쥐여 주었다. 마치 잃어버린 건강을 쥐여 주듯 내 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며 어머님의 온기도 나눠줬다. 많은 날이 있었고 많은 사랑이 건너왔다. 그날의 지압 볼도 어머님과 나 사이 여러 다발의 이야깃거리 중 하나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내게 건네주었다. 보약처럼 그 치성을 먹고 살았다는 생각을 지금에서야 한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상대방이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듯했다. 


사랑을 말보다 늘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전해주려 그날도 백숙과 함께 지압 볼을 들고 뜨거운 공기를 가르고 오셨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지압 볼은 건강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손에 쥐게 된다. "아, 어떡하지 " 하는 순간이면 찾게 되는 걱정 인형처럼 손 닿는 곳에 두고 수시로 만지작댄다. 이십여 년 전에 어머님이 내게 해주셨던 "이걸로 손바닥 혈 자리를 눌러주면 온몸에 좋다더라" 그 말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해가 갈수록 사람의 기억은 흐릿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된 게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은 더 또렷해진다. 사무치기까지 한다. 더할 나위 없이 안일한 자리, 꽃진 자리에서 밀고 올라온 이파리가 무성해지는 5월이면 부모의 그늘이 더 생각난다. 


늘 받기만 하다가 어버이날을 핑계 삼아 자식으로서 뭔가를 해드렸던 때다. 발품 팔아 선물을 고르고 풀어볼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는 일이 나를 설레게도 했다. 
정성껏 그리고 예쁘게 포장하는 일이 받는 사람만큼 행복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고 싶어도 이젠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게 서운하다. 길가 유명 가수의 가로등 배너가 바람을 맞고 펄럭인다. 어머님이 기분 좋을 때 흥얼거리는 노래의 가수다. 도로변에 걸린 효도콘서트 광고만 봐도 오월의 내가 쓰리고 아린다. 중요 부품이 사라져 조립하다 말고 밀쳐둔 반제품 같다. 부속물이 차지하지 못한 그 자리 때문에 휑한 벌판처럼 쓸쓸하다. 


어제는 상점마다 진열해 둔 카네이션을 지나치지 못하고 꽃바구니 하나를 사 왔다. 식탁에 올려놓고 보니 휑한 자리가 조금은 채워졌다. 비로소 위로의 등 하나 켠 것처럼 마음이 밝아졌다. 어머님이 백숙을 먹여주며 나를 바라보던 눈빛처럼 맑고 환하다. 


건강 때문에 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내게 어디에 있든 어떤 순간이든 당당해지라고 했던, 아픈 몸 자책 말고 웃으며 살라고 당부했던 목소리가 들린다. 
지압 볼을 쥐고 꾹꾹 누른다.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도 꾹꾹 누른다. 손바닥이 뜨끔하다. 혈관을 타고 늘 내 편이 돼주셨던 어머님이 온몸 구석구석 퍼진다. 잔잔한 물결 위로 한없이 떨면서 퍼져나가는 달빛을 보는 듯하다. 가슴에 그런 사람을 품고 있어서 편안하다. 내일부터는 몸이 개운해질 듯하다.      

 

 

김지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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