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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2월 31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6.0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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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느새 내 앞에 여진이가 있었다.
 “아, 언제 왔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괜찮아. 이제 내가 여기에 있어.”
따뜻한 커피 한 모금과 고소한 빵 냄새. 여진이와 헤어져 있는 동안의 나는 소소한 삶의 행복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왔구나 싶어 커피처럼 쓰고 진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야.”
여진이가 지긋이 나를 바라봐주고 있었다. 어딘가 어색한 내 미소 앞에서, 시간 앞에서, 가만히 그녀가 나를 지켜봐주고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손 내밀어봐.”
나는 그녀의 말대로 오른손을 탁자 중앙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여진이가 내 손동을 토닥토다 그녀의 손바닥으로 다독어줬다.


 “자. 이제 따라 해봐."
그 다음엔 나를 다독이던 그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서 스스로 자기 마음을 쓰다듬어주었다.  ”남이 해주는 위로만큼이나 스스로 자신을 안아주는 것도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안아주는 일에 인색하지만, 사실은 그것만큼 중요하고 따뜻한 행동도 없을 거야."
생각해보니 까마득하다. 나는 언제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었나.


거울 속의 나에게,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이미 충분히 잘해 왔다고 괜찮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기나 한 것인가. 타인의 눈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시선으로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삶, 생각해보면 그것이 행복에 가장 가까운 오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나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깨달음이었다.

 

우리가 용기를 내지 못했고 그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다면,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모른 채 눈감았을 수도 있다. 세상의 마지막 빛을 눈으로 담으며 후회만 하다가, 안타까운 눈물만 흘리다가, 행복했던 시절을 잊은 채로, 내가 이루어온 수많은 아름다운 순간을 까마득히 잊은 채로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다. 사랑은 그렇게 우리가 혼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너무 가깝고 당연해서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그 사람의 눈에 비춰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이다. 토닥토닥 쓰담쓰담. 우리는 이 순간을 사랑하고 있다.


그날 밤, 우리는 분위기와 함께 무르익었다. 우리라는 말 속에 그녀와 내가 있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던 올해의 마지막 날. 한겨울에도 피는 꽃이 우리 사이에 있었다.
 "있잖아. 나는 이 꽃이 봄에 피는 꽃인 줄로만 알았는데. 글쎄 오늘같이 추운 날에도 이렇게나 활짝 피어서 놀랐어. 꽃을 주는 일은 참 오랜만이다, 그치?”


정확히 3년 만에 나는 그녀에게 꽃을 전했다. 그때는 결말이었지만 그날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순백의 꽃잎과 샛노란 암술로 조화롭게 피어난 수선화. 공교롭게도 그 꽃말은 자기 사랑과 존중이었다. 아마 그 꽃이 조금 일찍 피어난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지금까지의 스스로를 인정할 용기가 생겼기 때문은 아닐까. 여진이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1202호. 내가 다시 그곳에 가게 될 줄이야. 
그녀의 집으로 들어서자 그곳엔 여전히 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늦은 밤, 불이 나가 화장실 전등을 갈아주던 내가 있었고, 내 손톱에 빨간색 메니큐어를 바르던 장난스러운 그녀가 있었다. 맥주 한 모금과 타코야끼 하나를 입속에 넣으며 좋아하는 영화를 보던 우리가 있었고 머리맡의 옅은 불빛 아래에서 입을 맞추던 여진이와 내가 있었다. 우리는 맥주 한 캔을 따서 건배를 했다. 


곧 새로운 한 해가 우리를 반겨줄 것을 기대하면서. 텔레비전에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종소리가 온 나라에 울려 퍼질 때 그녀와 나는 입을 맞췄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가벼운 떨림,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아직 다 익지 못해서 생각보다 조금 더 단단했던 키위를 안주 삼아 우리는 맥주 두 캔씩을 마신 뒤 침대에 누웠다. 그녀가 온수 매트를 켰다.
 “온도 너무 높이지 마. 저번에 나 자다가 깼던 거 기억하지?”
 “걱정 마.”
 “아, 여진아 근데 화장 지우고 자야지.”


 “응 귀찮다. 네가 지워줘.”
술취했던 여진이에게 해주었던 기억을 더듬어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젖은 솜으로 닦아냈다. 눈을 감고있는 모습이 마치 잠든 것만 같아 괜히 말을 걸었다.
“여진아 나 잘하고 있는 거야?”


 “응 꼼꼼히 잘하네. 내년에도 해줬으면 좋겠다.”
그녀의 화장을 깨끗하게 지워주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스킨로션을 톡톡 바르고 나서는 내 품에 들어왔을 때 기분이 참 묘했다. 그녀의 체온이 나의 통증을 다 녹여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져왔다. 잠깐의 적막을 밀어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여진아, 나 이제 곧 죽어. 조금씩 잃어가면서 결국엔 다 잊어버릴 거야. 너도, 그리고 우리도 말이야." 

 

 

김지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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