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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와 바람 소리 친구삼아 해녀배 몰며 외길 30년

지방소멸대응프로젝트 해녀이야기
윤준범 해녀 배 선장(53)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6.2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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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청산바다를 무대로 파도소리, 바람소리를 친구로 삼아 살아온 사람이 있다.


군살하나 없는 몸매에 태양에 그을 린 구릿빛 얼굴을 가진 장덕호의 윤준범 선장이다.


그는 지난 30년간 청산바다 이곳저곳에 해녀들을 실어 나르며 물질을 해왔다. 
청산도가 고향인 윤선장은 대학을 다니다 군대에 입대하고 전역 후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장덕호의 선장이 됐다고 한다.


 ″대학 2년을 마치고 의무경찰을 지원하여 갔습니다. 전역을 하고 학교 복학기간과 맞지 않아서 집에서 아버지 일을 도와주던 중, 아버지께서 대학복학을 하지 말고 아버지를 도와 이 사업을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설득했습니다. 


저도 자식들 중 누군가는 이 일을 맡아서 해야되겠구나싶어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 들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아버지와 큰 의견 충돌없이 해나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구나 싶습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청산도의 문어를 모두 사들일 때였습니다. 집안에 일이 엄청나게 많아요. 대학을 포기한 것에 대해 어머님은 선뜻 내켜하지 않으셨지만, 그렇게 선장이 돼 키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청산도 처자와 했다.                     
″집사람과 저는 꼬마 때부터 알던 사이였어요. 외갓집이 국화리인데 집사람이 외갓집 옆집에서 살고 있었어요. 중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별 관심이 없었고 대학 2학년 때 광주에서 아주 우연히 만났는데 시내버스 안이었어요."


"의경으로 있을 때 편지를 거의 날마다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마음이 있구나 싶어 몇 번 대쉬를 했는데 그럴수록 멀어지는 겁니다. 그러다 집사람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집사람이 너무 외로움을 느낀 거예요. 그때 손을 내밀었는데 자연스럽게 감정이 생겨서 연애를 하다 스물 여섯 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청산도에서 10년을 살았어요. 집사람은 신혼을 느끼지 못하고 집안 일에 매달렸습니다. 당시 청산도에 문어 배가 15척 정도 있었는데 그 많은 문어를 다 사들였었어요. 그러니 전화 받을라 저울질 할라 1분 1초도 한눈을 팔지 못하고 일에 매달리면서 큰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완도로 이사를 나왔습니다.″ 


″집사람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는게, 아들만 3명인데 두명은 청산에서 낳고 셋째는 완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완도로 이사 후 제가 청산에서 일을 할 때는 집사람 혼자서 애들을 키웠어요. 요즘으로 말하면 육아독박(?) 애들이 사춘기 때도 집사람 혼자서 애들 세명을 감당했는데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맘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는 아들 말고 딸을 낳자고 했으나 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집사람의 친정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집사람이 외로움을 많이 타서 아들이 둘 있으니 딸을 한 명 낳자고 했는데 또 아들을 낳았어요. 그런데 그 막둥이가 엄마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인데 공부도 곧 잘하고 있어서 우리 부부를 기쁘게 합니다"        

 

윤 선장은 올해 봄 30년간 키를 잡았던 장덕호를 먼 친척되는 아저씨에게 맡기고 수산물 유통업으로 전환하였다. 
″큰 아들이 수산물 유통업을 시작했어요. 경험도 부족하고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여러 곳에서 문제점이 생겼어요. 그래서 당분간은 안정이 될 때까지 멘토로서 역할을 해 줄려고 나섰습니다.″   


해녀배를 운영하면서 어려움을 이야기 해 달라하자 망설이던 윤선장은 돌풍으로 매년 한 두 번의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정비를 잘해서 다니지만 바다에서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요. 크고 작은 고장도 여러 번 있었고 돌풍을 만나 배가 좌초 위기에 빠진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특히 30대 후반 때 만난 돌풍은 지금까지도 해녀 세계에서 회자되며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겨울철인데 국화리와 장도 사이에서 돌풍을 만났습니다. 해녀들이 12명 정도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손을 쓰지도 못하고 배가 전복 직전에 놓였어요. 몇몇 해녀들은 파도가 엄청 거친 바다로 뛰어들고 저는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다는 생각으로 키를 잡았습니다." 

 

"다행히 장도쪽으로 붙어 배를 구했습니다. 불과 10여분이었지만 등줄기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몇 시간이 흐른 듯 긴장하여 그날은 아파서 드러누었습니다.″           
여러해 동안 수산경영인연합회 청산면 지회장을 맡아 어업인들을 위해 봉사를 했던 윤선장은 해녀들을 위한 지원이 조금이라도 이루어졌으면 한다고.
″완도군에도 7·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해녀들이 수산물을 채취하여 지역경제를 상당부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정책적인 지원은 하나도 없었어요." 

 

"해녀들도 많이 은퇴하였지만 지금도 30여명이 넘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책들이 펼쳐졌으면 좋겠습니다.″


윤선장은 그나마 올해부터 참소라 방류 사업이 시작되었다며 해녀들의 안전을 위해 제주처럼 컬러 슈트를 마련해 주면 좋겠다며 자리를 떴다.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유영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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