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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람과 파도에 실려 자유로이 펄럭이는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걸린 태극기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 재현 전시실,
여러 문양의 국기는 무슨 의미일까?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8.10 13:40
  • 수정 2023.08.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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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의 물결이 찬란하다. 완도 화흥포항에서 대한, 민국, 만세호를 타고 소안도에 가면 집집마다 내걸린 태극기가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8월이다. 언제 보아도 그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답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 내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에는 다양한 종류의 태극기가 걸려있다. 여러 문양의 태극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기는 조선통신사에 의해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뚝딱! 만들어졌다고 배운 적 있다. 제아무리 국권을 잃었다지만 국가의 상징을 어찌 그렇게 쉽게 만든단 말인가? 국기로서의 논쟁거리도 많다. 태극을 모태로 한 것과 팔괘를 그려 넣은 것은 중국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모두가 올바른 역사를 배우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됐다.  


태극기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882년 8월 수신사 박영효가 메이지마루 호 선상에서 만들어 내건 것은 사실이다. 일개 대신이 한 나라의 상징인 국기를 즉석에서 만들어 걸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퍼졌다. 이 부정한 역사 왜곡을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이다. 


국기 제정에 대한 과정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1883년 1월 27일(고종 20년) 조선왕조실록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조선 말, 외교와 통상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에서 아뢰기를 "국기를 이미 제정했으니 팔도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여 다 알고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말하니 "윤허한다"는 기록이 있다. 국기가 제정된 상황에서 공식 선포하고 사용을 권장 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의 태극기와 관련한 최초 기록이다. 1961년 진단학회가 펴낸 한국사를 보면 더 자세한 기록이 있다. 최초 논의는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당시 강화도회담에서부터다. 그때 나라의 상징인 국기가 필요했는데, 이 사실을 청나라가 알고는 청의 국기를 본떠서 사용하라며 간섭한다. 조선은 국기 제정에 따른 양국 위원을 임명했다. 우리 측은 이응준을, 청은 마건충을 위원으로 내세웠다.


1875년 8월 운양호사건 후 조일수호조규 체결 때부터 조선은 이미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청의 극심한 내정간섭에 시달렸던 당시 기록을 보면 조선이 속국임을 뜻하는 용기(龍旗)를 사용하라는 청의 압력이 있었던 것 같다.


고종은 이를 무시하고 조선을 상징하는 별도의 국기를 원했다. 국기를 제정하는 과정에서 고종의 의지로 탄생한 것이 태극기인데, 최초로 사용한 것은 한미통상조약 때이다.


최종 도안 문제가 확실하게 매듭지어지지는 않았던지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태극기를 가져갔는데, 청의 압력을 피해 고종이 의도적으로 8괘와 4괘 두 종류를 가지고 가게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현재는 고종의 명을 받은 이응준이 4괘 태극기 도안을 냈고, 박영효가 일부 수정한 것을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로 인정되는 분위기다. 


선상에서 수신사 일행과 영국영사관 아스톤, 선장 제임스는 태극 8괘의 도안을 숙의한 끝에 건곤감리 4괘로 최종 결정했고, 일본 출발에 앞서 고종의 지시를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태극기 도안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군사 지휘기인 좌독기(左纛旗)와 군주를 상징했던 태극 팔괘도에서 연유한다고.

 

1882년 10월 2일 도쿄의 시사신보에 “조선은 지금까지 국기가 없었는데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를 청국의 것을 모방하여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한데 대하여 고종이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거절하면서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도를 적색, 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괘를 붙여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을 하교하였다”고 보도했다. 고종이 국기 제정을 모두 관여했고, 박영효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태극기를 사용했다는 내용이다.


태극기는 다섯 번의 변천과정을 거쳤다. 첫째는 고종의 지시에 따랐고, 두 번째는 1885년 고종이 외무담당 미국인 데니에게 선물해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됐다. 세 번째는 1896년 독립신문 제호에 실렸으며, 네 번째는 1900년 파리박람회 때 사용했다. 다섯 번째는 지금의 태극기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42인 국기제정위원회를 구성했다. 국권이 희미할 때 고종은 태극기와 대한(大韓)의 국호를 제정했고,  나라를 잃었을 때 우리는 독립을 위해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흠모했다.

일제 강점기 때 선조들은 일본 몰래 태극기를 사용했는데, 그때는 국기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정해지지 않아서 사용처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태극기가 그려졌다. 그것을 기념해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서는 여러 문양의 태극기를 전시관에 내걸었다. 독립을 준비했던 투사들의 이름을 새긴 태극기도 있다. 

광복이후, 우리는 얼마나 태극기를 사랑한 적 있는가.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국가 중요행사나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 응원전에서 격하게 사용된 우리네 국기사랑, 나라사랑! 그런 의미로 항일의 땅 소안도에서 선조들이 전해준 태극기의 다양한 문양을 살펴보며 그 뜻을 되새겨 봄직하다. 8월의 무더위보다도 더 뜨거운 심정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품어볼 일이다. 


소안도 주민들은 자자손손 태극기 사랑에 큰 자부심을 갖고 산다. 그래서인지 소안도에 가면 태극기가 먼저 우리를 반긴다. 저 푸르른 하늘위에서, 드넓은 바다위에서, 거친 바람과 파도에 실려 자유로이 펄럭이는, 소안도는 태극기의 섬이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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