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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그곳이 헤테로토피아 *

에세이
김지민
수필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3.08.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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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한 뭉치의 생각을 푼다. 잘 풀리다가도 급체하듯 생각도 헝클어질 때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팽팽함 사이에 엉킨 구석이 있다. 그때마다 내가 느슨해질 방법을 찾아서 매듭이 다시 풀릴 때를 기다린다. 언제부턴가 집이 아닌 작은 무인카페를 찾아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카페는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안성맞춤이다. 억지로 꿰맞추면 미셸 푸코가 말한 헤테로토피아가 별거인가 싶다. 내겐 작아서 아담하고 사람은 있지만 붐비지 않는 이곳이 도시 속 지극히 현실적인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아파트 주변에 작은 무인점포가 들어왔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지금은 길 건너에 아담한 카페와 초등학생을 주 고객으로 둔 각종 문구를 파는 점포가 있다. 나는 종종 물건들이 방문객을 맞이하는 그곳에 들어가 진열된 상품을 구경하고, 아이들이 살법한 예쁜 문구 한두 개 사는 걸 즐긴다. 요즘엔 무인카페에서 복숭아 맛 요거트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상큼한 과일을 입안 가득 담고 있는 기분이 들어 맛과 향이 포만감을 충족한다. 문을 밀면 딸랑하는 소리를 끝으로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곳.
처음엔 익숙지 않은 소비자가 되는 게 낯설었다. 폭우가 내리던 날이었다. 몰아치듯 내리는 빗소리가 세상을 빈틈없이 채우고도 넘쳤던 날. 이러다가 물이 천지를 덮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었다. 공포를 직접 맞닥뜨리면 한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물줄기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처마 같은 곳, 공동현관을 나서자마자 두 발은 물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젖었다. 잠들어 있는 두려움을 깨우려는 듯 빗줄기 내리꽂는 소리가 우산으로 몰려들었다. 소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더는 어딘가로 향하는 건 무리겠다 싶을 때 카페 통유리를 통해 노란빛이 빗속으로 들어왔다. 우중으로 스며들었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비 맞은 사람을 포근하고 아늑하게 감싸줄 것 같은 웜톤. 한낮인데도 해거름처럼 쓸쓸했던 날과 대비되며 진정제를 복용한 듯 마음이 잔잔해졌다. 걱정하다가 간절해지고, 슬프다가 어이없어지는 그런 사실들. 세상은 온통 물과 관련된 소식으로 범람하는 중이었다. 진회색이 둘러싼 현실을 피하려는 듯 빛에 이끌려 카페로 들어갔다. 점원도 없었지만, 방문객도 없었다. 따듯한 차 한잔, 그리고 제한된 공간이 날씨에 감금된 나를 해방해 주었다. 
그때 눈으로 들어왔다. 무분별하게 삶으로 들이닥친 빗물이 바닥에서 산산조각 흩어지는 세계가 보였다. 파편화된 것들이 한데 모여 흐르고, 고이고, 넘친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그냥 떠내려간다. 물처럼, 강처럼, 바다처럼. 그러다 보면 해가 뜨겠지. 무언가에서 벗어나거나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내가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어린 시절 다락으로 숨어드는 걸 좋아했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다른 공간 같아서 아늑하고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혼자서 다락에 앉아 틈으로 바깥을 살피면 마치 나만의 비밀기지 같았다. 아빠의 잔소리도, 학교에서 있었던 언짢은 일도 그 안에서는 삐꺽거리는 바닥에 마음 놓고 내려놓았다. 
숨기로 작정하면 여기만큼은 나를 이유 없이 숨겨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는 공간. 어른의 감시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일탈을 감행할 수 있었던 현실 속의 유토피아였다. 누구나 자신만의 헤테로토피아가 필요하다. 아이였던 나에게 음습한 다락이 그런 곳이었다면 내가 안전하다고 믿었던 세상이 비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그 날 나만의 공간은 무인카페가 된 셈이다. 
사실 도시에 살고 있어서 어린 시절의 비밀기지와 같은 감응적 장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감정도 비를 맞을 때가 있다. 제대로 말리지 못하면 일상까지 물살에 휩쓸리게 된다. 사람은 각자도생처럼 젖은 몸을 펼쳐 놓기에 걸맞은 장소를 찾는다.
전시회나 도서관 그리고 편안하고 특색있는 카페의 경험을 공유한다. 혼자든 함께든 다양한 사람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현실을 직면하고, 스스로 찾아낸 헤테로토피아에서 잠깐 쉼이란 시간을 가진다. 얼마나 건강하고 절실한 소통인가. 처음부터 이곳을 나의 유토피아로 만들어야지 작정하고 찾은 공간은 아니지만, 마음이 그곳을 찾게 되면 거기가 바로 헤테로토피아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집안일로 힘들어하는 동료를 데리고 마름꽃 피는 무인카페를 갔다. 커튼으로 살짝 가린 창문으로 저수지가 들어오는 풍경을 품고 있었다. 쨍한 여름날 마름꽃과 연꽃이 수면에서 바람을 맞이하는데 마치 여름의 성찬이 내 앞에 차려진 기분이었다. 
저수지를 앞에 두고 넋 놓고 물을 보면 외로움도, 내가 짊어진 버거운 무게도 기꺼이 사냥할 수 있는 곳. 
그곳에 다녀온 후로 직원이 내 옆으로 와 넌지시 속삭였다.
"마음이 힘들 때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요. 그곳 알려줘서 고마워요."
작은 무인카페가 내게도, 그녀에게도 비밀기지가 됐다.
나는 지금 맞은편으로 내가 사는 아파트가 보이는 무인카페에 앉아있다. 둘러보니 혼자 앉아있는 사람도 보인다. 그들의 표정이 편안해 보인다. 혼자이면서 외롭지 않은 까닭은 여기가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따듯한 장소이기 때문이리라.

 

칼럼니스트 주>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제시한 개념: 현실에 존재하며 유토피아적 기능을 수행하는 현실화된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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